스파티필름
작년 초겨울 어느 날 우연히 보았다.
누렇게 변한 잎사귀 끝이 눈에 거슬려 자를까 말까 순간 망설였지만
새로 나오는 잎사귀를 위해서는 과감하게 솎아내야 한다고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서 너개 잘라냈다.
첫날은 서 너개 자르는 걸로 만족했지만
다음 날 보니까 또 끝이 누우런 잎사귀가 보여
마치 지저분한 머리를 자르듯이 한 움큼 잘랐다.
시원하게 다듬어진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흐뭇했다.
며 칠이 지난 다음 혹시나 지저분한 잎사귀가 있나 싶어 찬찬히 들여다보며
몇 개를 골라 거침없이 잘랐다.
이제는 휑해진 모습에 아차 싶었다.
실수를 한건 아닐까 갑자기 겁이 났다.
"죽으면 안 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잎사귀를 하나하나 깨끗하게 닦아주고 쌍화탕도 물에 희석하여 듬뿍 주었다.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예전에는 하지도 않던
관심을 가끔씩 보이며 쌍화탕에 사이다 그리고 우유를 물에 희석시켜 주고
계란껍데기도 잘게 부숴서 화분에 소복하게 덮어주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새순도 나오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풍성해졌다.
엄동설한을 자랑하듯 겨우네 영하 10°를 오르내리는 최강추위의 겨울이던,
지구온난화를 부르짖으며 강추위가 없었다고 언론에서 호들갑을 떠는 겨울이던
겨울은 동토의 계절이다.
동토의 계절을 미련 없이 보내고 훈풍이 불며 우리 동네 꽃동네로 부활하는
초봄부터 마냥 기다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가끔씩 위로도 하면서.
목련이 지더니 개나리가 덩달아지고
벚꽃도 후다닥 이벤트가 끝나도록
우리 집 거실에 있는 스파티필름은 감감무소식이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며
혹시나 잎사귀를 너무 많이 잘라서 그런 걸까?
수 없이 후회를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말에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도 무심히 지나가자
왜 꽃이 피지 않는 것일까?
날이 갈수록 불길한 예감을 애써 떨쳐버리며
아무리 실내 공기 정화 식물이라고 자랑을 해도 화초이기에
꽃은 기본이다라고 조용히 설득을 했지만 꿈쩍도 않는 스파티필름을 보고
있으려니 답답했다.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기다림에 지쳐 기어이
"꽃은 피지 않는 거니?" 잎사귀만 무성한
스파티필름에게 나지막이 물어보았다.
"그러다 너 버림받을 수 있어"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이제는 뽑아서 화원에
갖다 주고 예쁘게 꽃 핀 화초로 바꿔야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이런저런 일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버려야지 하면서도 혹시나 미련이 남아서 잎사귀를 하나하나 점검하다 심쿵했다.
그건 분명 새하얀 꽃잎을 잉태한 초록빛 잎사귀였다.
버렸음 어쩔뻔했어.... 아찔했다.
초록빛 잎사귀 줄기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더니
어느 순간 새하얀 꽃잎을 톡 하고 터뜨리자
곁에 있던 초록빛 잎사귀들도 이에 질세라 너도나도 새하얀 꽃잎 잉태했다.
날이 갈수록 새하얀 꽃잎들이 화사하게 피어
그들은 공허한 내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고 있다.
하루하루가 기쁨과 흥분에 들떠 살아있음에
감사했으며 곱고 단아한 그들의 자태에 취해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
살구가 익어가던 6월 초에 꽃이 피더니
'화무십일홍'을 거부하며
6월 달 내내 천진난만하게 미소를 지으며
순간순간 내 마음을 사로잡었다.
7월 장마철이 지나자 새하얀
꽃잎들이 점점 초록빛으로 변했다.
초록빛으로 변신을 거듭한 꽃잎들은 역대급
무더위도 무사히 보내더니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10월에도 여전히 내 곁을 지키고 있다.
허기진 내 영혼과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고 있는
신통방통한 그들을 어이할까나!
2024.10.24
Na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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