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 집에 가다가 아파트 뜰안에서 살구 보았다.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움이 가슴을 찔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핸드폰 카메라에 손이 가고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살구를 담아냈다.
살구와 이웃사촌
현관문 앞에 제법 큰 검은 비닐봉지가 있다.
'뭘까' 순간 멈칫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노란 열매가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있다.
"아...!" 드디어 거사를 했구나...
딸아이가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해방된 민족처럼 자유를
부르짖으며 정작 학교 다닐 때는 어지간히도 공부를 안 했으면서
새삼스럽게 늦바람이 들어 영어회화와 일어를 배우러
간 사이 그들만이 거사를 치러 살짝 서운했지만 어쩌겠어.
묵직한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 오면서 되지도 않는
공부를 한다고 스트레스만 받는데 재미난 일을 놓쳐 버린 게
못내 아쉬워 힘이 쑥 빠져졌다. 솔직히
어쩌면 햇살이 따사로워서 더 빛나던 봄 어느 날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가면 이상하게 향긋한 향기가 났다.
온갖 음식물이 뒤엉켜 나는 그 역겨운 냄새를 희석시키는
향긋한 향기의 범인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음식물 쓰레기 모아놓는 화단 옆에는 연분홍 꽃망울을 톡톡
터트리고 달콤한 향기를 풀풀 풍기는 나무가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장을 향긋한 향기로 스며들게 하는 나무는
그 넓은 아파트 뜰안 여기저기에 있었고 특히나 화단마다 한 두 개는 있어
그들이 뿜어내는 달콤한 향기는 아파트
단지를 향기천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른 아침 거실문을 활짝 열고 초록빛 나뭇잎 사이에 피어있는
연분홍 꽃잎과 눈맞춤하며 그들의 향기에 흠뻑 취해 천상을 오가는 나날을 보내곤 했다. 한동안은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잎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향기천국 이벤트는 끝이 났고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연분홍 꽃잎과 함께
어느 순간 그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비가 다녀가자 초여름 햇살이 따가워 나무 그늘부터
찾아 화단옆을 지나는데 노란 살구가 있었다.
살구라니? 그건 분명 살구였다.
화단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살구는 놀라움에 연속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봄날에 달콤한 향기를 풀풀 풍기며
그토록 황홀한 나날을 보내게 한 정체를.
패잔병처럼 상처투성 살구를 신기하여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믿기지 않아 뚝 건드려 보았다.
옆으로 살짝 구르며 "살구"라고 한다.
허둥지둥 나무를 올려다보니 노란 살구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은 왜일까?
한참을 바라보다가 노랗게 잘 익은 살구를 향해
아쉬운데로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던졌다.
높이 매달린 살구는 무심하게 우산을 내려다보고 우산만 화단 저 멀리 날아갔다.
다시 우산을 주워서 던져보았지만 살구 근처에 가지도 않는다.
삼 세 번 또다시 있는 힘껏 우산을 던져본다.
흔들리긴 한 것 같은데 그들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애꿎은 새우산만 망가져버리고 나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화단에 떨어진 패잔병 살구 서 너 개를 집어 들고
무모한 행동을 지켜본 살구나무가 창피하여 싱긋 웃음을 날리며
재빠르게 발길을 돌렸다.
저만치에서 인사성 밝은 슬기 엄마가 인사를 하며 다가와
살구 서 너게 들고 있는 걸 보고 까르르 웃으며 살구 서리 하자고 한다.
어린 시절 나무 타기하고 놀았다는 슬기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403호 태현이 엄마네 가서 살구 서리 작전을 짰다.
304호 슬기 엄마가 나무에 올라가 살구를 따면
403호 태현이 엄마랑 303호 지현이 엄마(나) 그리고
203호 민기 엄마가 나무아래에 커다란 보자기를 받쳐놓고 받으면 된다.
혹시나 동네방네 참견선수 화쟁이 앞동 할머니를 만나면
많이 드리겠다고 아부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작전에 넣었다.
하지만 그렇게 스릴 넘치고 재미난 일에 늦바람 스트레스뿐인
영어회화 일어를 한다고 놓쳐 버렸으니 늦바람이 문제긴 문제였다.
힘이 쑥 빠져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살구를 깨끗하게 씻어 입안에 쏙 넣었다.
와작 아.... 눈물이 핑 돌았다.
쓰고, 시고, 떫기까지 한 이럴 수는 없었다.
왜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새삼 놀라서 가만히 들여다보며 이 많은 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함 살구청' 번개같이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으니
매실청처럼 살구청을 담으면 되겠네.
설탕 3kg을 사다가 빈병에 살구와 설탕을 섞어 넣었다.
그리고 살구와 설탕이 잘 어우러져 살구청이 되기를 학수고대했다.
스무날이 지나고 드디어 살구청 병을 열었다.
다시 한번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을 경험하는 데는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살구꽃 향기가 없는 살구청은 그저 설탕에
절여놓은 밍밍한 맛의 열매였다.
왜 사과, 복숭아, 배, 키위들은 음료수가 있는데
살구는 음료수로 만들지 않은지를 알게 되었다.
물론 아파트 뜰안에는 '빛 좋은 개살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임자 없는 살구나무들 사실은 먼저 따는 게 임자는 살구인 지라
제법 큼직 막 하고 토실토실하여 시중에 내놓아도 상품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이는 달콤한 살구들은 이미 발 빠르고 손 빠른 사람들 차지가 되고 만다.
한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다녀가자 아파트 뜰안 풍경은 사뭇 다르다.
꽃인양 곱기만 하던 연둣빛 나뭇잎은 초록빛으로 한여름 맞이 준비에 나섰고
토끼풀도 부쩍부쩍 자라 아파트 뜰안을 가득 채우며 행운에
네 잎클로버를 찾아보라고 선 듯 유혹하고 있다.
어디에선가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흘러나온다.
도대체 누가 어디에서 이토록 환상적으로 연주를 하는 것인지
그리고 하필이면 왜 살구나무가 있는 아파트 뜰안에 울려 퍼지는 것인지.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환상적인 손놀림이 선연하게 떠 올라
지금도 장마철이 시작되는 비 개인 오후에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떠 오른다.
마치 신기루를 본 것처럼.
녹지 공간이 많아 사시사철 힐링하면서 살던 아파트도
개발 붐이 불면서 이웃사촌 우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많던 녹지 공간은 25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과연 재건축이 능수능란하게 우리 삶을 힐링으로 바꿔놓지
못하는다는 것도 경험하며 살구꽃과 살구 전설도 끝이 났다.
2023.6.28
Na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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