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uRang 책읽기

로마인 이야기 율리우스 카이사르

NaMuRang 2024. 8. 26. 07:55

바야흐로 2024년 2000년도 지난 지가 벌써 

20년이나 지났지만 서구 매스컴에서는 아직도 그를 왜 영웅으로 칭송하는 것일까?

그 의문을 호쾌하게 풀어 줄 책이 있다.

작가에 대한 호불호는 갈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대기만성의 표상였던 그는

명문 귀족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세는 이미 기울어 로마의 서민들이 사는
'수부라'동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물론, 시대적 상황이 술라와 마리우스의 힘겨루기 싸움에 휘둘렸다 하더라도

20대 후반에 개업했던 변호사도 실패로 접고 절치부심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한 건 서른이 지나서부터였다.

 

서른이 지나면서 그는 안찰관, 최고 제사장, 법무관등을 두루 거치면서
로마의 '사회 간접 자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로마 가도를 보수하는 일과
그의 성격과 잘 어울리게 검투사들의 시합도 누구 못지않게 화려하게 개최한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런 일 할 때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데
특별하게 물려받은 유산도 없고 아직은 이권을 챙길 만큼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닌 그는
그 시절 로마 기사계급(경제인)중에서 가장 돈이 많았던 크라수스의 돈을 꾸어서
그런 일을 했다고 하여 역사가들은 그를 남의 돈으로 혁명을 하려고 했다고 전한다.

얼마나 빚이 많았으면 법무관을 지낸 그가 서른여덟 살 때

에스파냐 속주(로마가 정복한 식민지)의 총독으로 가야 하는데

빚쟁이들이 못 가게 했을까 싶다.

어쩌면... 그가 제대로 자신의 꿈을 펼치기 시작한 건

마흔이 지나고부터였으니

대기만성형의 표상은 바로 카이사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정관이 되어서도 원로원 의원들에게 공공의 적인 이유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기원전 753년)하면서부터 자문기구로 만들었던 원로원은
카르타고 태생의 한니발이 코끼리를 대동하고 알프스산을 넘어 로마로 쳐들어 왔을 때에는
원로원 의원들이 똘똘 뭉쳐 나라를 구하는 일에 선두에 서서 포에니 전쟁을 결국 승리로 이끌었지만,

나라가 번창하게 되면서부터 원로원도 그와 정비례하여 세력이 커진다.
비대해진 세력은 원로원끼리의 세력 다툼으로 술라는 살생부까지 만들어
마리우스파 사람들을 수천 명씩이나 죽이며 공포정치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던 걸 경험한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나라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원로원 체제 타도'를 주장하여
원로원 의원들로부터  공공의 적이 되는 자충수를 두고 말었다.

 

원로원과의 갈등을 참다못해 그가 고안해 낸 삼두정치.
그 당시 소아시아(오리엔트)를 재패하고 마치 알렉산드로스대왕처럼 영웅같이 떠 받들어지던

폼페이우스와 기사계급(경제인)으로 로마에서 돈이 가장 많던 크라수스와 같이

비밀리에 협상을 이루어낸다.

마침내 그들의 도움으로 기원전 60년 그의 나이 마흔에 집정관에 당선됐다.

 

이듬해 기원전 59년 1월 1일 집정관에 드디어 취임한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이루어진 모든 논의와 토론과 결의를 오늘날로 하면 국회 속기록을 신문처럼 만들어

포로 로마노 벽에 붙여 로마 시민 모두가 볼 수 있는 열린 사회를 구현하는 걸로

그의 정치적 첫걸음을 내디뎌 전통을 파괴하는 급진파가 아니라는 점을 민중에게 부각시켰다. 
공직자들이 받는 선물에 금액 한도를 정한 '율리우스 공직자 윤리법'과
기득권의 권익을 침해한다 하여 '농지법'을 창안했던 그라쿠스 형제를 암살로 몰아넣었던

 '농지법'등이 카토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의 철저한 토론을 거쳐

 민회에서 법안이 성립되는 기지를 발휘한다.

 

그리고 자신의 외동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에게 시집보낸다.
폼페이우스가 오리엔트에서 원정을 하고 있을 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부인과 바람을 피워
폼페이우스는 오리엔트를 평정하고 귀국길에 부인과 이혼을 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웠으니

카이사르와 원수가 되어도 될 성싶은데

이혼하고 바람피운 남자의 딸과 결혼한다는 게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그건 순전히 정략 결혼였다.)

카이사르보다 나이가 6살이나 많은 47에 폼페이우스가
22살에 카이사르 딸을 신부로 맞이하여 41살의 장인은 카이사르다.

물론 바람둥이 카이사르도 젊은 귀족 청년 폴케르가 자신의 부인과

내통하여 원로원에서 문제를 삼자 그를 변호해 주어 무죄를 얻어냈으며

그를 평민으로 만들어 호민관(평민의 권리를 주관하는 기구)에

당선을 주도적으로 밀어준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자신의 딸과 나이가 비슷한

원로원의 유력자 피소의 딸과 정략결혼했다.

 

집정관 임기 1년을 마친 뒤 속주의 총독으로 가는 건 누구나 하는 관례이지만 
원로원과의 갈등은 여전하여 카이사르가 총독이 되면 군사를 갖게 되는 것을 우려한다.

그래서, 원로원은 이탈리아 전역에 있는 산림과 도로를 담당하는 '삼림 가도'라는

직책을 새로 만들어 주려고 했지만,
그 정도의 농간에 넘어가는 카이사르는 절대로 아니었다.


삼두정치가 여기에서도 그 효력을 단단히 발휘하여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카이사르가 원하던 갈리아(프랑스) 지방과 일리리아,

북부 이탈리아등 3개 지역 속주 총독을

임기 5년에 손들어 주어  원로원에서도 꼼짝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속주에 가 있는 동안 로마에서 자신의 수족처럼 움직여 줄 사람으로는 원로원의 막강파워이자 

자신의 장인 피소, 자신의 사위이자 오리엔트를 정복하여 당시

원로원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폼페이우스

그리고 자신의 부인과 내통하였지만 용서하고 호민관으로 밀었던 풀케르를

선정하는 용의주도함을 벌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원로원의 횡포에 가까운 권리행사로
오리엔트에서 5년 동안 싸움으로 오리엔트를 재패하고 돌아왔던 폼페이우스조차도
부하 병사들에게 '퇴직금'형식으로 주게 되어있는 토지 분배에 해결 실마리를 주지 않아

카이사르가 서두르지 않았으면 무산될 뻔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속주 총독으로 있던 갈리아 지방에서의 활약

그가 속주로 가게 되는 갈리아(프랑스)는 숲과 늪 그리고 하천이 많아 물이 풍부했고
기후도 혹독하지 않아 농업과 축산으로 먹고 살만은 했지만,

크고 작은 부족들 100여 개가 100가지 생각을 가지고 존재했다고 한다.

속주에 평화와 안정을 책임져야 하는 속주 총독인 카이사르는 
게르만의 침입으로 생존을 위해 이동하는 헬베티부족을 속주의 안정을 위해
다시 고향땅 스워스로 보내는 과정에서 충돌이 갈리아 전쟁을 일으킨 첫 해이고
그 이후로 갈리아를 침입하는 게르마니아인과 자유를 찾아 속주를 벗어나고자 하는

갈리아 부족들과 크고 작은 전쟁들을 8년 동안 치르게 된다.

 

'로마인 이야기'를 쓰신 시노오 나나미 작가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이렇게 섰다.
"로마인은 바람처럼 습격해서 사람을 죽이고 약탈한 다음
바람처럼 사라지는 유형의 정복자는 아니었다"

 

로마인은 정복한 땅에 패배자를 죽이거나 노예로 팔지 않았을뿐더러
승자와 동등한 자격을 주어 로마와 동맹관계를 맺고 평화와 안전을 책임졌으며

특히나 정복지 청소년들을 로마의 명문 귀족 가문집으로 보내 교육을 받으며 자라게 하여

장기적인 안목에서 정복자 땅을 로마화 작업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술의 천재라고 하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코끼리를 대동하고 알프스산을 넘어

로마로 쳐들어 와 그 유명한 칸나이 원정에서 로마군에 승리를 한 후 로마 동맹국의 붕괴를

기다렸지만 끝내는 동맹관계가 무너지지 않아,

자마 원정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속주 갈리아에서 치른 전쟁기를 쓰게 된 이유

갈리아 전쟁기를 쓴 카이사르는 기원전 1세기 갈리아인(프랑스인)과

게르만인(독일인)그리고 브리타니아인(영국인)의 생활 풍습도

자 국민 로마인에게 알리기 위해  자세하게 서술했다.

기사(군사담당)와 사제(드루이데스)가 지배하는 갈리아(프랑스)는 평민계급은 노예와 같았고,

지참금을 가진 아내의 경제권은 인정했지만 자식 와 아내의 생사권은 남편에게 있었으며
인신공양제와 순장(殉葬) 제도가 있었던 걸로 보아 지배계급의 권력은 왕 이상으로

막강했다 하더라도 

어느 지역에서나 심지어는 집안에서 조차 둘 이상의 파벌이 있었다고 한다.

 

강가에서 남녀가 함께 목욕을 한다 해도 늦게까지 동정을 지킨 자가 가장 존경을 받았던

게르마니아 (게르만족)인은 전시에는 지휘관을 선출하고 평시에는 부족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공동체 생활을 했으며 우유와 치즈를 주식으로 하는

수렵민족으로 남자들은 사냥과 전투로 일생을 받쳤던 그들도

탁월한 카이사르의 전술에 혼이나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침입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갈리아 전쟁 4년째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영국)까지 침공한 카이사르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푸른색 물감으로 온몸을 물들이고 날쌔게 움직이는 것을 목격한다.

남자들은 부자와 형제가 같이 10명에서 12명까지 아내를 공유했으며

브르타니아인도 갈리아인과 마찬가지로 우유와 고기를 먹고 모피를 몸에 걸쳤다고 한다.

상인조차 왕래가 없는 오지인 브리타니아(영국)를 두 번씩이나 침공하여 격전을 벌이고 승리하여

카이사르의 우월성을 재 확인하며 로마시민들을 열광시킨다.

 

이길 때도 있으면 질 때도 있는 게 전쟁이라고 하지만,
하다 못해 집안에서 조차 2개 이상의 파벌이 존재하는 갈리아 부족들에게는
지장이자 명장인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전쟁에서는 속수무책였다.

갈리아 전쟁도 7년째가 되던  해에는 갈리아에도 베르킨게토릭스라는 걸쭉한 저항군 지도자가 

강력한 리더십으로 드디어 로마 속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레시아에서 카이사르와 공방전을 벌인다.
갈리아 각지에 있는 부족들이 대동단결하여  제공한

병력 34만 명과 카이사르의 5만의 병력이 사흘동안의
공방전 끝에 진홍빛 망토를 바람에 펄럭이며 병사들을 진두지휘하던 카이사르가 결국은 이기고,
베르킨게토릭스가 자진해서 포로가 되면서 카이사르에게 요구했던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갈리아 유력자들은 포로 신세를 면제받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 작가가 쓴 로마인 이야기 중 카이사르를 읽으면서
어쩌면 갈리아인(프랑스인)들은 우리들하고 품성이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했다.

속주(식민지)를 당하고 있는 입장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보는 듯싶어

마음이 불편했고, 더구나 일본인 작가가 쓴 글이기에 묘한 반항심이 생겼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로 끌려가 6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살려두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유능한 인재였기 때문에 사형을 당한다.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나블에서 19세기 프랑스가 유럽 문화를 리드한다고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글을 쓰셨는 데

기원전 50년 갈리아에서 1800년 후 프랑스를 보면 올챙이 개구리적 생각 못한다고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어 슬며시 미소가 머물어졌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치르면서 쓰게 되었던 '갈리아 전쟁기'는
라틴 문학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키케로 조차도
'사려 깊고 현명한 이들에게조차 역사를 쓸 의욕마저 꺾어버리는 결과를 낳을 정도'로
간결함과 명석함 그리고 세련된 우아함이 글 속에 녹아 있다고 한다.

그는 왜 주사위를 던지고 루비콘 강을 건너 야 했을까?

로마시민들에게는 더 없는 영웅였던 카이사르였지만,

갈리아 저항군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처럼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위험 인물였다.

원로원 의원들도 자신들이 살아갈 길을 모색하기 위해 기원전 63년 43세에 오리엔트를 평정하고

기원전 60년대 당시 지중해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로마인이자 영웅였던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인다.

물론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사위였지만  갈리아 전쟁 5년 되던 기원전 54년

폼페이우스 부인 율리아가 죽어 이제는 카이사르의 사위도 아니었다.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죽지 않았으면 공식적인 삼두정치를 '루카 회담'에서 성사시켰을 때처럼

왕정 조짐만 보여도  알레르기 반응 일으키는 원로원 의원들을 생각해서라도

폼페이우스과 같이 이두 정치를 하면서 '내전'까지는 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고 루비콘 강을 건넌 건 기원전 49년 카이사르 나이 50였을 때였으며

폼페이우스는 그 보다 6살 많은 56살였다.

 

당시 로마 성안에는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오는 카이사르를 피해 공화정을 지지하는 원로원파 의원들과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탈출하여

자신의 클리엔테스(피보호자) 지역에서 병력을 모은다.

 

전쟁에서 지는 것도 이기는 것도 경험했던 카이사르는

디라키움에서 패배를 하고 맨 나중에 전쟁터를 떠난 전사였던 반면,
생애 전쟁에서 한 번도 져 본일이 없었던 폼페이우스는

파르살로스 회전에서 패배하고 맨 처음 전쟁터를 떠난 전사라는

치욕적인 역사에 기록을 남긴다.
패배자에게는 파트로네스(보호자) 권리마저 문전박대당하면서

폼페이우스 자신의 또 다른 클리엔테스(피보호자) 지역 이집트로 향하지만,

이집트땅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사신으로 왔던  프롤레마이오스 13 세왕 측근에게

배 안에서 살해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만남

폼페이우스가 죽은 지 엿새째 되는 기원전 48년 카이사르는 이집트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다.

프롤레마이오스 12세는 세상을 떠나면서 맏공주와 맏왕자가 공동으로 통치하도록 유언을 했지만

맏왕자 측근들은 누이인 클레오파트라를 제외시켜 이집트 왕궁은 분쟁 중였기 때문에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관계'였던 카이사르는 당연히 분쟁 당사자 프롤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누나 클레오파트라를 불러 해결이 실마리를 풀어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소문이야

(41살에 집정관이 되고 그 이듬해 갈리아 전쟁터로 나가 8년 동안 전쟁을 치르고 다시

 내전 2년째인 52살의 카이사르 앞에 나타났던 꽃다운 나이 

21살의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애인이 되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 하더라도
어차피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유언한 대로 맏공주와 맏왕자가

공동으로 통치하라는 판정을 내린다.

공정한 판정였지만 대가는 치르게 되어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프롤레마이오스 13세는 죽고,
클레오파트라와 막내동생 프롤레마이오스 14세가 공동으로 이집트를 통치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며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떠났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4번의 개선식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그리스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 틈을 타 부왕이 잃어버린

영토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소아시아 절반을 손에 넣었던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도 카이사르가 왔다는 소식에는

이미 겁을 집어먹어
명성 하나만으로 이길 수밖에 없었던 전쟁 젤라(지금의 터키 질레)에서 승리하며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전과 보고를 로마 원로원에 당당하게 보냈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피보호자)지역였던 소아시아 와 고대 최고의 문명국였던

그리스를 자신의 기반 기지로 새로이 다져갔다.

그리고 공화정을 끝까지 고수하던 원로원파 의원들을 탑수스 회전에서 대승하며

로마로 귀환하여 그동안 못했던

로마인이라면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 개선식을 4번씩이나 했다.

암살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당시 로마는 원로원파만이 소수 지도체제 공화정을 목숨 걸고 지켜려고 한 것일까?
그래서 원로원파의 선두 주자 중에 한 명였던 카토는 탑수스 회전에서 패배하자
소수 지도체제라 해도 공화정을 택한 로마에서는 모든 시민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 원칙인 이상,
한 로마인이 멋대로 다른 로마인을 사면하고 용서하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 특권이라는

논리로 자결을 한다.
제 아무리 나라 발전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하더라도 당시 로마에서는 한 개인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주는

왕정은 있을 수 조차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율리우스 달력을 비롯하여 이자율 상환선 설정,

속주의회 인정, 공영 징세기관 설치, 카르타고와 코린트 재건 등등

기존 집정관들은 감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을

개혁하고 실행했지만 종신 독재관 임명은 그를 왕정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와 기원전 44년 3월 15일 브루투스와 정치적 견해를 같이했던

14명이 스물세 군데나 찔러 카이사르 나이 56살에 암살당했다.

 

카이사르 유언장에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약관 18세에 카이사르 후계자가 되었지만
외유내강형의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카이사르의 선견지명이 탁월했다는 것을 보여주듯
자신이 모자라는 부분은 참모들에게서 채우면서 자신의 견제 세력였던

안토니우스와 야심덩어리 클레오파트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33년 페르시아를

이기고 이집트를 지배하던 그리스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을

악티움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그들을 자살로 몰아넣고 카이사르가 그토록 원했던 제정으로 갔다.

 

자~ 여기까지가 시오노 나나미 작가가 쓰신 제1권 로마인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에서

부터 시작해서 제2권 한니발 전쟁, 제3권 승자의 혼미, 제4권 율리우스 카이사르(상),

제5권 율리우스 카이사르(하)까지 로마인 이야기다.

하필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초첨을 맞혀

쓰게 된 이유는 초기 왕정에서 공화정까지를 총 망라해서 모든 걸 갖추었던

사나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짚고 넘어가야 할 이유야 충분히 있었다.

초기 왕정이 로마의 건국과 법률에 초석을 놓았다면 그 후 평민들의 계급투쟁을 통해 

공화정이 무사히 안착이 되어 700여 년 동안 소수 지도체제가

나라 발전에 핵심 역할을 하면서 로마를 지중해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한

국으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원로원의 한계성이 드러나

 암살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제정에 초석을 다시 놓았다.

 

어쩌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우리가 흔히 사람들을 비교하여 이야기할 때 인용하는

삼국지연의 유비의 온유함과 제갈공명의 비상한 두뇌회전과 조조의 사람

다를 줄 아는 기술과 쾌락을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를 통해 빼어난 글 솜씨도 선보였으니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서구 매스컴에서는 화자가 되고 영웅으로 대접하는 것 같다.

물론, 청렴 결백한 생활을 무엇보다 중시하고 

공화정에 대한 신념은 자살까지 한 동시대 원로원 막강파워 카토나 

20세기 초까지 리더십의 바이블로 읽혔던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엄청 비난하고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정도로 싫어했지만,

로마인의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 작가는 

카이사르가 깨끗하지도 않고, 품행도 좋지 않고,

야망은 남달리 강하고, 엄청난 빚을 지고도 태연했고,

정치를 해도, 전투를 해도, 항상 이기고,

민주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아닌데 지지자는 부족하지 않고,

게다가 이런 일들을 거침없이 추진해 버리는 사나이라고 이야기한다 (동의하십니까^^)

 

우리나라에 유난히 인기가 있었다고 하는

시노오 나나미 작가 쓴 '로마인의 이야기'는 

기원전 753년 로마의 탄생과 기원후 476년

서 로마가 망하기까지 이야기를 

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를 시작으로

15권'로마세계의 종언'까지를 테베레 강 근처 팔라티노 언덕에서

로마왕국이 어떻게 성장했으며 왜 공화정을 선택했는지

또다시 제정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왕정의 문란과 혼란

로마제국이 서 로마와 동 로마로 분리 통치, 황제들이 왕권신수설로

그리스도 종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렇지만 그리스도교가 승리를 했고

황제들의 무능력은 반달족의 침입으로 서서히 무녀져갔고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 로마가 망하기까지 소설형식을 빌린 역사서에 

가깝고 소설이다 보니 읽는 것도 수훨하고 재미도 있다.

또한 시노오 나나미 작가가 로마제국 관한 문헌과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읽고 정리하여 쓴 글이

문체가 수려하다든가 그런 건 없었어도 팩트에

가깝게 쓰고자 하는 열의는 인정하고 싶었다.

2024.8.26

Na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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