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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교류기행 - 정 수 일-

NaMuRang 2012. 12. 12. 10:12

 

'인류'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지구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 21세기를 흔히 글로벌 시대라고 한다.
무한 경쟁의 글로벌 시대 자체가 국가간의 문명교류이지만 불과 몇 세기 전까지도 현재 주도권을 가지고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서양은 동양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동방을 직접 여행하고 <동방 견문록>을 펴 내자 당시 서양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폴로가 임종하는 자리에서 친구들이 '거짓말'을 했으니 회개하라고 했으니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문명교류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정수일 교수는 '문명교류기행'에서 주장하고 계신다.

 

한겨례 신문사에서 1년동안 매주 한 번씩 연재하였던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은 총 47장으로 되어있다.

1934년 중국 연변 출신의 정수일 교수는 베이징대학를 졸업한 인재로 중국 외교부에서 일했지만
그의 조국 북쪽으로 돌아가서 학자로 활동하다가 '공작원'이란 신분으로 남파된다.
'무하마드 깐수'라는 이름의 아랍계 필리핀인으로 남쪽에 정착하여 교수로 있으면서 학자로만 활동하였지만 1996년 구속되어 5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일제 식민지시대 그것도 연변에서 태어나셧으니 암울했던 우리 근현대사를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정수일 교수의 인생사 어쩌면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작업이란 문명교류가 아니였을까 싶다. 솔직히.

문명교류의 대가답게 <이븐 바투타 여행기><고대문명 교류사><이슬람 문명><문명교류사 연구>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신라.서역 교류사>를 집필하셨는 데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은

그 동안 집필하셨던 책들의 다이제스트라고 보면 될 듯 싶다.지식인의 사회환원이라는 명제아래^^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여 남부유럽과 서아시아 북아프리카를 통치하면서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해 있었듯이 동서양의 문명교류 또한 '실크로드'를 통해 이루어졌다.
'단군신화'부터 조선조까지 역사적 유물로 '실크로드'를 따라가며 실존적 검증을 했던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을 편의상 고대,중세,근세로 나누어 보았다.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복이 한중 교류의 서막을 열다-
단군신화가 고대 서방 신화의 모태라고 하는 수메르의 길가메시 신화에서 연유하였지만
친구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져 지하세계로 추락했던 길가메시 신화보다는
환웅이 하강하여 웅녀와 혼인하고 단군의 탄생으로 고족선이 건국되었고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산신이 되었다는 단군 신화는 천상세계와 지상세계가
조화롭게 어울어진 신화소로 민족의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나 청동기 시대의 동검들은 우리 고대문화가

중국과 무관하게 유라시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문화의 꽃을 피울 수가 있었다

 

고대 중국과의 문명교류는 진시황에 이르러서야 진행 되었다.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복이 선약(블로초)을 구하려고 와서 서귀포 정방폭포 암벽에
서복과지(徐福過支)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고대 한중 교류의 서막이 오른 셈이다.

 

-고대 삼국시대의 문명교류-

기원전 37년 주몽(활을 잘 쏘는 사람)이 건국한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터에
중국 한나라에서 설치했던 군 현을 쫒아내고 부여계 종족들과 규합하여 지안현 퉁거우를 수도로하여 나라를 세웠다.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절에 전성기를 맞아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 한강 상류까지 대제국으로 성장하였으며 705년(기원전 37~기원후 427 이전 평양천도 이후 427~688)까지

장수하였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능숙한 외교정책 였다. 먼 곳과 친교를 맺어 가까운 곳을 공격한다는 원교근공(遠交近功)의 탁월한 외교정책은 당나라의 침입에 시달리던 서역제국들과 연합하여 당을 협공하는 것이다.1965년 우즈베크에서 발견 된 사마르칸드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는 7세기 중엽(650~655년)이곳을 통치했던 와르푸만 왕을 진현했던 12명의 사절단에 조우관을 쓰고 있는 고구려인도 있었다. 이처럼 위풍당당했던 고구려인들의 혼과 생활상이 그려진 벽화가 제2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고구려의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재 되었는 데 중국 영토안에 24기 평양을 중심으로 71기가 있다고 한다.

 

나라가 망해도 영웅호걸은 어느 장소에서 건 존재감이 뚜렷하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그 한 예가 고구려 유민(遺民)의 후손였던 고선지다.
당나라에서 20대에 이미 유격장군이 되었던 고선지는 파르미고원과 힌두쿠시산맥,텐산산맥같은 험산준령을 넘나들며
11년 동안(740~751년) 서역원정을 하면서 네 차례에 걸쳐 연전연승을 하였다.
그의 최후 전투였던 탈라스전투(751년)에서 패전함으로써 이스람이 중앙아시아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이스람제국과 당제국이 동서에서 양립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확립되었다. 고선지 서역원정은 아랍인들을 통해 중국의 제지기술이 유럽각지에 전달 되어 출판인쇄술을 탄생시키는 촉메제가 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르네상스가 출현되어 인류문명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였다. 20세기 초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스타인은 그가 전투를 벌리면서 넘나들었던 힌두쿠시를
답사하고 나서"현대의 어떠한 참모본부도 다룰 수 없는 것이며 나폴레옹이 알프스 돌파보다
더 성공적인 것"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수서>에 백제란 이름은 "백가제해(百家濟海)"즉'100家 집을 건네다'에서 유래 되었듯이

백제는 해상을 통해 문명교류가 진행되었다.
특히 백제인들은 고대 일본이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를 개화하는데 주도적인 역활을 하게된다.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는 5경 박사가 일본에 건너가 <주역><예기>등 5경을 가르쳤고,
왕인 박사는 <논어>10권과<천자문>1권을 가지고 가서 일본 황태자와 군신들에게 한자와 경전을
가르치며 문맹퇴치에 한 몫 단단히 했을 뿐 아니라 아스카 불교 문화를 일본에서 꽃 피우게
한 것 또한 백제인이며 일본 전역에 저수지를 만들어'백제지'라고 한것 또한 백제인이라고 한다.
백제 웅진시대(474~538년)'중흥의 대왕'였던 무령왕(501~523 재위)에서 출도 되었던 황금 왕관
뒤에 장시 되어 있는 새모양은 북방 유목 문화에 속하는 신조 사상였고,유리 제품들이 많이
출도 되었는데 유리제품들은 남방 해상 루트를 통해 동남 아시아를 비롯한 인도=태평양문화권으로
유입 된 것이라 하니 가희 백제는 해동 성국이란 말이 전혀 무색하지가 않다.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라는 고대 황금 문화를 꽃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 신라인들의 무덤에서 나오는 금관은 장례식 부장품일 가능성이 많다는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고대 황금 문화권은 황금 생산지 알타이 지방을 중심으로 스키타이가 개척한 동방교역을 통해
서방으로는 그리스에서 동방으로는 신라로 문명교류가 이루어졌다.
특히나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 된 황금장식 보검은 누금상감양식기법과 나선무늬 메달무늬등
전형적인 그리스-로마 무늬이며 가야와 산라 고분에서 출도 된 손잡이가 달린 토기잔이나
용기류도 로마세계에서 들여 온 것으로 중국이나 일본등 동양 문명권에서는 손잡이를 달지 않아
고구려나 백제 유물에서는 볼수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로마제국이 전성기 일때 로마는 남해로를 통해 신라와 동방 원거리 무역을 했다는 반증이다.

 

-중세 통일신라시대와 발해-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통일신라시대에는 서역문화가 홍수처럼 넘쳐났다.
(중앙아시아,인도,페르시아(이란),대식(아랍)을 한자 문화권에서는 근세까지 서역이라고 부른다.)
중국을 통해서만 아니고 서역과 직접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향료와 보석이 귀족 사대부는

물론이고 일반인까지 인기가 있어 흥덕왕(843년)은 사치품을 금하는 칙령까지 내릴 정도였다.
특히 경주에서 발견된 무인석이나 토용은 서역인이 신라에 살면서 무인이나 문인으로 기용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처용 설화의 처용 또한 서역인 였다고 하니 서역인들이 신라에 귀화하여 남긴 뚜렷한 발자취들이다.

 

통일신라시대 문화의 꽃은 석굴암이다.
인도,중앙아시아,중국에서는 석굴을 만들 때 굴을 뚫고 그 속에서 직접 불상을 조각하는 자연석굴이 반면 경주 토암산은 단단한 화강암이라 굴을 뚫고 그 속에서 직접 불상을 조각 할 수가 없어
산을 파 굴을 만들고 조각한 불상들을 조립한 후 흙을 덮는 미증유 시공법으로 만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인공석굴이면서 돔 양식의 짜임새 있는 건축물 또한 자랑거리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원정으로 간다라 지방에 온 그리스인들이 헬레니즘 신상 숭배 하는 것을 보고 불자들도 불상 만들었던 간다라미술의  헬레니즘 양식과 신라인의 미 의식이 융합하여 23년(751~774년)동안 만들은 중세 불교 미술의 꽃이 석굴암이라도 한다.

 

중세에 오면 인류는 국가간에 왕래가 빈번해 진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세계로 첫 발걸음을 옮겼던 혜초 스님은 704년 신라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 나이에
중국 광주로 건너가서 천축(인도)에서온 밀교승 금강지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밀교를 처음 접하게된다.금강지 스승의 권유로 중국 광주에서 출발하여 인도 서역을 여행하면서 쓰게 되었던

<왕오천국국전>은 723년 중국 광주에서 출발하여 바닷길로 동천축(인도)에 상륙하여 석가의 열반처와 녹야원등 4대 성탑을 순례하고 중,서,남천축(현 데칸고원)과 북천축을 돌아 간다라와 카슈미르 토화라(현 아프가니스탄)를 거쳐 대식(아랍)치하의  페르시아땅 니샤푸르가 종착지였다.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오도릭<동유기>이븐 바투타<이븐 바부타 여행기>함께  세계 4대 여행기 중에 가장 오래된 혜초의<왕오 천축국전>에서 혜초스님은 4년에 걸친 여행을 통해 목적지로 가는 방향과 소요시간,왕성(치소)의 위치와 규모,통치상황,대외관계,기후와 지형,특산물과 음식,의상과 풍습,언어,종교 등을 순차적으로 간명하게  기술하였으며 지극히 서정적인 여행기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신라)날아가리 ...왕오천국국전 중에서...)

 

현재 세계 1위로 맹위를 떨치는 조선업은 어쩌면 이미 통일신라시대 장보고가 씨를 뿌렸다고 본다면

정확한 판단이란 생각이 든다.

790년 전라남도 청해진(완도)에서 태어난 장보고는 8~9세기 동북아(중국,신라,일본)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지방 토호들이 지방분권적 체제로 변해가는 격변기에 청해진(전남 완도)을 중심으로 사무역과 공무역을 아우르며 해양왕국을 건설하여 당과 신라 그리고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의 기틀을 마련했다.신라인들에 의해 해외진출과 해상교역을 할 수 있었던 일본은 항해 수호신으로 '신라신'을 숭배하였으며 일본 천태종은 전산선원을 세워'적산대명신'(적산신라신)을 모셨는데 그 중심에는 장보고가 있다고 한다.

 

대동강과 원산만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유민들이 30년간 피나는 부흥운동으로 대조영이
698년 건국하였던 발해는 10대 선왕시대 전성기를 맞이하여 사방 5천리 한반도 면적의
2.2~2.5배나 되는 면적을 소유하여 당나라에서도 어쩔 수 없이 행동성국(바다 동쪽의 융성한 독립국) 이라고 인정을 했지만 신라 중심의 <삼국 사기>에는 발행사가 아주 무시 되었다.
하지만 고조선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발해는 통일신라와 더불어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전반까지 우리 민족의 두 역사임에는 틀임없다.사통발달했던 발해는 국제교통망인 5개의 국제도로 즉 거란도(상경~부여),영주도(영주~중원)압록도(압록강~산동반도)신라도(동경~신라)일본도(동경~일본)를 통해 사신과 문물교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면 사통팔달했던 발해답게 고대 동방기독교와 불교가 융합한 모습을 보여주는 동경 용원부(현 훈춘)에서 출토 된 삼존불의 왼쪽에 있는 협시보살 목에 십자가가 유물로 남아있다.

 

-해상 강국으로 서방인에게 코레아(고려)의 존재를 정확하게 인식 시켰던 고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다를 잘 다스린 나라가 강성 했다는 것은 정설이다.
우리 겨례 5000년 역사 중에서 해양강국을 이름을 날렸던 시대는 고려라고 한다.

 

고려가 해양 강국이 된 동기와 그로 인해 얻어졌던 대외무역을 보면

 

첫째: 해양호국 출신였던 태조 왕건은 건국 후에도 해군총관역을 맡아 중상주의로
건국의 기틀을 다지면서 장보고의 암살로 무너졌던 해상왕국을 70년만에 일으켜세웠다.

 

둘째: 장보고가 경영했던 해상루트를 확대하여 중국 송과 일본은 물론이고 동남아,아랍까지
대외무역을 했으며 국제 무역항 벽란도에는 회회족(아랍,이스람)상인까지 수백명씩 왕래가 있었다.
송나라의 수입품은 비단,금은공예품,자기,약재,불경,유학서,의학등 서적이 많았으며
고려인의 수출품은 나전칠기,도자기,옷감,붓,부채,종이,무기,마구류였다.
회회족(아랍-이스람)은 수은,몰약,소목(외과용약재)등을 왕에게 바치기도 했고 비단을 하사 받기도했다.

 

셋째: 첫 민족통일국가로 코레아(고려)가 서구인에게 분명하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인들은 우리 계레에게 세계적인 자랑거리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광 또한 마련해 주었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청자는 자화자찬이 아니고 세계적인 자랑거리다.

영국의 세계적인 도예 이론가 버나드 리치는 물론이고 청자 뿐아니라 자기 조차도 자신들이 원조라고 자부심이 강한 중국 사람들도 "고려 비색(청자)이 천하제일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세계적으로 압도적인 인기가 있다보니 일본에 다니 슌제이는 고려청자를 복원했다고 하면서

10년간 사기극 벌어지는 사건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청자의 인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전칠기에 장식줄을 박는 입사법을 청자에 도입하여 상감기법과 혼합하여 제작하는 기법은
세계 어떤 나라도 시도 한적이 없는 고려만의 독창성였기 때문에 신비스런 초록빛의 고려청자가

탄생한 것이다.물론 17세기 자기를 만드는 나라는 고려와 중국뿐이었다 하더라도.

 

둘째: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지구촌에 인쇄술의 혁명을 일으켰다.

기원전 3000년께 메소포타미아에서 인장이 출현하여 인쇄술에 효시가 되었지만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선종의 요체를 기록한 <직지>는
1455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로 제작했던 '42행 성서'보다
앞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됨으로써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사용한 사실을 확인할수 있다.

 

셋째: 불교가 건국이념이자 국교인 동시에 정신적 지주였던 고려에서는 어쩌면

'경장'(부처의 가르침)'율장'(불자의 계율)'논장'(경장과 율장 관한 해석)을 담을 수 있는

대경장(세 개의 광주리)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1011년 현종 때 거란이 내침하자 선종 때인 1087년까지 77년간
대구 부인사에서 송나라판과 거란판 대장경을 참조해 6천여 권의 경판<초조대장경>을 만들어
이 대장경의 원력으로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갔다고 믿게 된다면 <팔만대장경>을 만들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1011년 초조를 시작하여 1251년 재조를 완성할 때까지 240년이란 세월에 걸쳐
663함, 1562부(혹은1516부), 6778권(혹은6783권) 경판 수 8만1340판에
8만4000가지의 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있는<팔만대장경>은 해인사 장경판전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463호)에 등재 되어있어 우리 겨례의 자랑인 동시에 인류의 공동유산임에는 틀림없다.

 

해양강국으로 중상주의를 표방하며 자주적 첫 통일국가로써
지구촌에서 최초로 눈부신 업적을 이루기도 했던 고려였지만  몽고가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끊임없는 내침을 받아야 했던 불운 또한 고려 500년사에서 지울수 없는 상처이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란 말도 있듯이 몽골의 7번에(1231~1259년)걸친 침입을 막아내고
백년간(1259~1351년) 원의 간섭을 막아내면서 고려는 몽골의 풍습과 이방인들이
귀화하게 된다. 전통혼례 때 신부가 쓰는 족두리, 신부의 뺨에 찍었던 연지,설렁탕은 몽골의 풍습이며 색목인 혹은 회회인(무슬림)이라 불린 서역인 중에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던 장순룡씨
경주 설씨의 시조인 회골출신의 설손씨 베트남 리 왕조 출신으로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던 이용상씨 등 60여개 귀화성씨가 있어다고 하니 고려가 이방인이 살기에도 평화로운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겨례에게 힘이 되는 인물은 있다.
고려말엽 1328년(혹은1329,1331년)경남 사천군에서 태어난 문익점은 33살 되던 해

공민왕이 실시한 신경동당시에서 급제를 했다.
사간원의 좌정언으로 승승장구하던 문익점은 1363년 원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반출을 금하고 있는 목화씨 10개를 붓뚜껑 속에 감추고 들어 왔다는 기록은
사적에 명시 되어있지는 않았지만 암튼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씨에게 나누어주어
3년간 시험재배 끝에 한 그루가 살아 남아 성공을 하게 되면서 우리 직물사 뿐아니라
산업구도와 생활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게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저질렀던 치명적 오류.

서구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종교개혁 등으로 서구문명의 근대화 바람은
조선뿐만아니라 한.중.일 동양 3국에 근대화를 부채질한다.

 

서구 근대문명을 '서학(西學)'이란 학문으로 연구하고 수용하게 되는 조선은
사상과 종교 이적(理的)과 과학과 기술의 기적(器的)의 영역을 포괄하는데
동도서기(東道西器)즉 전통적인 제도 사상은 지키면서 서구 근대 과학을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흙,물,불,공기로 우주 변화를 설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부정하면서, 우주에 있는
근원적인 기가 변하여 흙,물,불,공기가 된 것이므로 4원소를 근본물질로 볼 수 없다고 통박했던
최한기는<신기통><성기운하><지구전요>를 집필했으며 조선조 초기 제작 되었던 '혼일강리역대국지도'는 당대 최고의 세계지도라고 지금도 인정 받고 받고 있으며 이수광<지봉유설>그리고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통해 "나라 위에 나라가 없고 나라 아래 나라 없다"는 약소국의 비애를 국가평등주의로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렇듯 조선에서 서학이 250년간 연구되고 진행되어 왔지만 일부 지식인들만 공유하는 학문으로 자리매김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결과가 우리 겨례에게 어떤 파장을 몰고 왔는지를 밝혀보기로하자.

 

첫째: 조선 사회를 지배하던 사대부들은 '사농공상'이라는 유교사상에 젖어 있어 과학 기술을 잡기로
통상을 모리행위로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둘째:개방을 요구하며 물 밀듯 들어오는 서방세계에 대해 비록 10년에 불과한 쇄국 정책였다 하더라도 국운 또한 분명 때가 있었기 때문에 그 10년이 나라의 운명을 놓쳐버렸다.

 

셋째: 세계에서 내노라하는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인정하는 조선 분청자기와 백자의 상권을 형성하지 못해 명성까지도 일본에게 넘겨주어야만했다.

 

5000년 우리 민족사에서 고대는 물론이고 중세 고려시대까지는 청자라든가 금속활자 등

세계 최고의 문화를 이룩하면서 서방과 문명교류 또한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근세 조선 사회를 지배하던 사대부들이 빠져있던 유교사상의 유토피아는 시민혁명에 산업혁명을 경험하는
 세계시장에서 현실적응력 부재로 나라에 주권까지 빼앗기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말었다.

2012.12.12.

Na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