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그늘에 대한 단상
향기도 없는 덩굴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시민운동장 철재 울타리를
빨갛게 물들이는 5월이 오면 더욱더 가 보고 싶다.
지금쯤 가면 있기는 하겠지? 의심 아닌 의심을 하면서
오늘내일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
마치 숨겨진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살짝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길을 나섰다.
코로나19 터지고 몇 년 만에 가는 발길을 갑자기 재촉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숲 속에 도서관이 생기면서 같이 있었던 장미 정원은 처음
몇 해 동안은 형형색색의 장미들이 뿜어내는 향기에 흠뻑
젖은 대지가 숨이 막힐 듯 황홀하여 지쳐가는 일상을 추스르곤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탁상행정이 늘 그렇듯이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장미정원은 스스로 무너지고 말었다.
돌 봐주는 이 없어 무성한 잡초 속에서도 연분홍 장미 노랑장미 흑장미 주홍빛 장미들이
태풍'마와르'를 잘 버텨내며 온전하게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다.
너무도 대견하여 눈맞춤하며 "그래 잘했어 그렇게 살아내는 거야" 아낌없이 찬사를 쏟아부었다.
화답이라도 하듯 달콤하고 고혹한 향기를 물씬 풍기는 그들의 향기에 취해
방황하던 내 중년의 삶을 치료해 주었던 안식처 중앙도서관으로 갔다.
창 넓은 도서관 열람실 창문 너머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인다.
수업이 끝난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재잘재잘 빠져나가고 나면
텅 비어버린 운동장에는 늦은 오후 햇살이 낯설게 찾아든다.
이스라이 멀어서 꿈속 같은 어린 시절 국민학교 운동이
아련히 떠 오른다. 내 인생의 황금기 어린 시절이....
검정고무줄을 길게 양쪽에서 잡고 노래를 부르며 펄쩍펄쩍 고무줄을 건넜던 고무줄놀이,
술래잡기, 손에 흙을 잔뜩 묻히고 납작한 돌멩이 튕겨서 땅따먹기 놀이하던 그 시절이
마냥 그리워 타는듯한 목마름으로 멍하니 운동장을 바라만 보았다.
석양빛이 조용히 내려앉은 텅 빈 운동장은 언제나처럼
에미 잃은 송아지가 슬픔에 젖어 허둥대는 석양의 뒤안길
인지라 슬픔이 가슴 가득하여도 애써 외면하며 의연한 척했던 내 중년의 삶.
어쩌면 그것은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엄마의 죽음을 보았던
트라우마 때문에 엄마의 그늘이 필요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몇 년 만에 추억을 찾아 돌아온 내 중년의 안식처.
도서관 열람실 넓은 창문 너머 풍경은
예전과 변함이 없다.
물론 딸아이는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지만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로서 34년을 살았고 8개월 된 손녀가 있으니
내가 그 아이들에게 온전한 그늘이 되어야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왜 했을까?
마치 태풍'마와르'를 굳건히 견뎌낸 장미들처럼.
2023.5.31
Na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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