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다.
마음이 급해 발걸음이 빨라진다.
소한과 대한사이 어쩌면 일년 4계절중 가장 추운 절기을 보내고 있다.
이쯤에서는...추위에 길들여질만도 한데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것 또한 추위다.
추위에 부대끼면서도 문득 겨울산행을 떠 올리는건 순전히 설산의 신비스런 매력때문이라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매 달 둘째주일은 전국의 지명 높은 산들을 산행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겨 언제나처럼
기다리게 만든다.
임진년 새해 둘째주일은 원주 치악산으로 정기산행이 있는 날이다.
아이젠,스팻츠,스틱등을 배낭에 챙겨 넣으면서 드디어 겨울산행을 하는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칠흑같은 어둠은 한밤중인척하지만 새벽 6시 우리동네 담쟁이덩쿨집 예배당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평안함으로 내 가슴에 적신다.
늦잠 들어버린 찬바람 덕분에 추위가 덜하긴해도 추운건 마찮가지다.
천만다행 사당동에 도착하자 치악산행버스가 와 있어 얼마나 반갑기만하던지.
산행버스 차 창문에 김이 서리기 시작하더니 하얗게 성에가 두툼하게 내려 앉는다.
손톱으로 성에를 밀어내며 창문너머 겨울풍경을 구경하고 싶어도 어느사이 김이 서리며 성에가 또다시 얼음처럼 덮히고 말었다.
설핏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황골주차장'이라는 총대장님의 안내 방송이 들려온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스틱을 꺼내 키를 맞추었다.
하얀눈이 살폿이 내려 앉은 주차장에서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서서 야무진 총대장님의 구령에 따라
잠시 스트레칭하면서 몸도 풀어본다.
오르막 아스팔트길을 한참 올라가자 커다란 바윗돌을 세로로 세워 '입석사'라고 깊이 세겨놓은 입 간판이 치악산을 찾아 온 산행꾼들을 반갑게 맞이해준다.
눈 밝은 회장님께서 나목들 사이로 보이는 사각형처럼 면이 끔지막한 바위를 '입석바위'라고
알려주며 지나가신다.
(티베리우스황제나 하드리아누스황제같은 느낌의 회장님 특별하게 친하진않아도 멋 훗날까지 감사하는 마음 만은 고운 추억으로 간직하겠지.)
어쩌면 아스팔트가 끝나는 지점였으리라 입석에 화답하듯 입석옆에는 '입석사'라는 아담한 사찰이 있었다.
지도로 볼때는 황골을 지나 입석대 그리고 비로봉 정상으로 올라가는 코스가 완만하게 보여 산행이
힘들지 않을거라 안심했지만 두어달만에 산행 초보자 산행꾼에게는 이 또한 힘에 붙힐뿐이다.
한 참을 올라 왔다 싶은데도 정상을 가르키는 표시판에는 비로봉 1.9km라고 한다.
천만다행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찬바람 덕분에 전혀 춥지가 않아 산행에 속도를
낼 수 가 있었다.
산 정상으로 올라 갈수록 수북하게 쌓여있는 하얀눈이 목화솜처럼 산속을 덮어 놓았다.
쏟아지는 겨울 햇살에도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새하얀 눈길은 도심의 눈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언제부터인가 눈이 오는 걸 질색하게 되었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눈이 오는 순간부터 차량 정체,눈이 녹았을때 지저분한 거리 등등 불편한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눈이 오면 아이나 좋아하는거지'라고 철없이 쏟아지는 눈을 향해 야속했던 적이
어디 한 두번였겠는가.
하지만 산속에서 만난 새하얀 눈은 발걸음 따라 뽀드득 뽀드득 울리는 눈 소리조차
너무도 사랑스럽다.
눈 오는게 겁이 나기까지한 도심의 메마른 생활을 탈출하여 하얀눈 속에 파 묻혀 바싹 말라버린
내 감성을 축축하게 적혀본다.
눈 위에 쓰는 편지.
출 퇴근길 어쩌다 먼지처럼 휘날리던 너를 볼때마다
불청객을 만난듯 외면을 했지만,
인적이 드문 산길에서 만난 너는 백지로 된 편지를 쓰게 하는구나!
도깨비 뿔처럼 정상에 서 있는 돌탑들이 아득히 보이기시작한다.
너무도 멀게 느껴져 암담하기도 했지만 정상 아래에서 점심식사를 할 수 있다는 사전 정보가
잠시 쉴 수 있다는 희망을 끝까지 놓지않으며 눈이 수북수북 쌓인 정상을 향해 부지런히 올라간다.
나목들이 울타리를 만들어 겨울산을 지키기도하고 능선을 따라 산성을 만들어 겨울산을 지키는
겨울산의 파수꾼 나목들의 든든한 모습을 보라보며
춥다고 연일 엄살을 떨던 내 모습이 어찌나 부끄럽기만 하던지.
산행하는 동안 내내 그들에게서 눈길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도깨비 뿔처럼 산 정상에 우뚝 서 있던 용왕탑이 비로봉 정상에 올라 온것을 제일 먼저 축하해준다.
재빨리 그들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치악산 비로봉(1288M) 정상 비석에 손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비로봉 정상 건너편 산들은 운무가 산허리를 감싸안아 하얀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매화산도 태기산도 계방산도 오대산도 가리왕산도 저 멀리 소백산의 능선도 하얀파도에 갇혀
섬을 이루고 있었다.
하얀파도가 일렁이며 섬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들이 드 넓은 바닷가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산신탑과 칠성탑을 지나가면서 문득 간절하게 소망하는게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이것이다'하고 떠 오르는건 없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참으로 많은 것을 소망하고 있을텐데...막상 돌탑위에 돌 하나 올려 놓으며
이것은 틀림없이 들어주셔야 합니다라고 꼭 집어 낼 수는 없었다.
마지막 칠성탑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뒤 돌아섰다.
임진년 새해 그대의 간절한 소망은 무엇인가요?
하산길에 만났던 사다리병창(사다리골 모양의 절벽).깍아지른듯한 절벽에 층층이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20~30cm는 족히 되게 쌓여있는 눈이 치악산을 찾아 온 산행꾼들에 밟혀 그야말로 미끄럼틀같았다.
치가 떨리고 악이 받친 산 치악산이란 별명을 새삼스럽게 경험하며
설설기듯 조심스럽게 눈 덮힌 사다리병창을 내려왔다.
구룡사 건너편 숲속에는 폭포수처럼 흘러 내리던 계곡물도 겨울의 속살을 보여주듯 허엿게
얼어 붙어 있다.
아직은 겨울이다.
추위로 부대낌을 겪는 만큼 따뜻한 봄날의 기다림은 더욱더 커지겠지.
기다림은 언제나 희망인가보다^^
2012.1.8
Na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