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uRang 책읽기

Vincent van Gogh - 민길호-

NaMuRang 2008. 3. 24. 11:26

외로움은 인간의 본질이며
그 외로움을 감싸주는 것은 
사랑이라고한다.
그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종교적 신념을 가졌던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30일 네델란드
브라반트의 준데르트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고한다.
고흐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는 
시골교회 목사님 이셨고 삼촌 세분이 화상이셨다.
빈센트도 젊어 한때 동생과 함께 
런던.헤이그 파리에 지점이 있던 
구필화랑에서 근무한적이 있다.
내 영혼의 자서전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Vincent van Gogh의 자서전은 민길호님께서 쓰시고
학고재 출판사에서 2000년도에 출간했다.
317페이지로 되어 있는 자서전에는 고흐 그림도
73점이나 들어있고 자세하게 설명까지 되어있어
그림에 문외한인 독자들도 쉽사리 고흐와 
친해지끔 꾸며져있었다.
중등학교 과정을 마친 열여섯살 되던해 빈센트는
규율에 얽매인 학교 생활을 청산하고 
센트 삼촌이 경영하던 구필화랑의 헤이그지점에서
일을 하게된다.
1873년 5월 런던지점으로 전근을 가게된다. 
하숙집 딸 외제니 로여를 사랑하게 되나 
그녀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는 고백을 듣고 
고흐의 첫사랑은 실연으로 끝나고 만다.
다시 파리지점으로 영구 발령이 났지만
고객과의 말다툼과 지배인의 불화로 
화랑에서 해고 통보를 받는다.
다시 부모님 곁에 돌아 온 그는 책방에서
일하면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얀 삼촌이
있는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공부 시작한지 2주만에 원서를 읽을 정도로 
라틴어는 잘했지만 그리어는 시간이 갈수록
이해하기가 안되 공부 시작한지 1년만에 목사
자격증이 필요 없는 전도사로 벨기에 북부
탄광촌 보리나주에 가게된다.
북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탄광촌에서
빈센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것을 
헐벗고 굶주린 탄광촌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며 진정 그들을
위해 간호하고 기도했다.
하지만 그런 희생이 오히려 질시와 의혹이 
대상이 되어 손가락질과 멸시로 교단에서는
전도사로서 자격이 부적당하다는 
해고 통보를 보내온다.
스물일곱살에 빈털털이가 된 그는 파리에서 본 
밀레의 전시회를 회상하며 자신도 화가가 
되려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된다.
화랑에서 근무하는 동생 테오가 보내준 돈으로 
1880년 가을 브루셀에 가서 미술학원을 다닌다.
헤이그에 있는 외삼촌 안토 모우베 화실에서 
잠시 기숙하며 미술 지도를 받기도한다.
'어릴 때부터 항상 자신을 따라 다녔던 외로움의 그림자.
그 어둡고 고독한 외로움의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고 짙어져 
사랑의 결핌,주위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소외감은
평생 같이 하였기에 하나님에게서 평화를 찾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인하여 새로운 힘과 희망을 얻었다고'
빈센트는 고백한다.
사회에서 이방인였던 그에게 하나님은 어쩌면
도피처요 피난처는 아니였겠는가.
비오는 어느날 차거운 빗속에서 서성거리던 여자가 
그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낀다.
그녀의 슬픈 미소 속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읽어낸 빈센트는
몸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창녀 시엔과 동거를 하게된다.
동생 테오가 보내 준 돈으로 시엔과 시엔의 어린딸
그리고 갓 태어난 아들까지 돌보며 그림도 그리고
가족의 행복을 누린다.
시엔과의 결혼을 원하지만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와
동생 테오의 반대는 결국 생이별로 종지부를 찍는다.
다시 누에넨 집으로 돌아 온 그를 위해 아버지는
집 뒤뜰 세탁장 건물을 개조하여 화실로 꾸며준다.
열두 살 위인 맘씨 무척이나 착하고 교양있는 
아가씨 마르호트를 알게된 빈센트는 자신 인생에서
진실로 사랑한 사람은 오직 하나 마르호트라고 고백한다.
특히 그녀는 빈센트가 틀림없이 유명한 화가가 
될거라고 굳게 믿어준 유일한 사람이다.
이 시절 고흐는 농촌 풍경 농부들이 사는 초가집
그들이 일하는 모습들을 그려냈다.
<감자 먹는 사람>들과
<녹색레이스가 달린 모자를 쓰는 농부의 얼굴>의
인물묘사의 정교함은 그 당시 고흐의 맘을
그대로 표현한 듯 싶다.
<저녁 무렵의 초가집>의 풍경화는 석양빛과 함께
내 고향 마을 풍경 같았다.
1866년2월28일 테오 동생이 있는 파리에 도착한 
고흐는 로트레크와 베르나르 그리고 시나크등
동료화가들을 친한 친구로 사귀게된다.
<중절모를 쓰고 있는 자화상><탕기 할아버지의 초상화>등 
초상화를 그리고 일본 판화에 심취하며
일본을 동경하게 된다.
입체감을 중시하는 서양화와는 달리
색의 농도에 의해 표현되는 평면구조로
색을 복합적으로 혼합하지 않고 단일 색상을
선과 면으로 구성하는 일본 판화의 선은
서양 그림보다 강력했다고한다.
일본 판화에 심취하여 모으기 시작한 판화들을 
1887년 새로 사귄 세가토리의 탕부랭카페에서
전시회를 갖기도했다.
고흐는 36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27점은
파리시절에 그렸다고한다.
새로 사귄 탕부랭카페 여주인 세가토리와의
사랑도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는 세가토리로 인해
헤어지는 아픔을 겪으며 
<가죽 포도주병과 야생 흰 장미가 있는 정물>을 그려낸다.
탕기 할아버지 화방에서 자신이 아이까지 지워버리고
카페마저 파산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고흐는 
<네 송이 해바라기꽃>을 그리며 그녀와의 
어그러진 사랑을 담았다.
드뎌 1886년 겨울 테오의 화랑에서 빈센트는 
개성이 뚜렷하고 이지적은 멋장이 화가를 소개 받는다.
이름하여 폴 고갱.
고흐보다 다섯살 위인 덴마크 출신 고갱은 
증권 거래소에서 일한 적이 있는 경제적으로
매우 성공한 사람으로 아내와 네 자녀가 있다.
그런 그게 모든 걸 버리고 새 출발로 화가가 고갱.
1888년 2월 20일 빈센트는 2년동안의 파리생활을
청산하고 아를로 오게된다.
노란집이라 불리는 건물을 일부 빌려 화실로
쓰기 시작하며 여행경비와 작업에 필요한 경비등
일절을 동생 테오가 부담한다는 조건 아래 고갱을 불러들인다.
아를시절 고흐는 참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던것 같다.
<랑글루아 다리와 그 밑에서 빨래하는 여인>은
다리위로 마치가 지나가는 모습과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빨래하는 
이국적이 풍경이 참 인상적였고
<생마리의 바다 풍경><생마리 바닷가의 고기잡이 배들>의 
바닷가 풍경은 파아란 바닷물과 하얀 포말이 
여름날의 거침없는 시원함과 함께 고기잡이 배들에 
정착은 한적한 포구를 연상하게 했다. 
그리고 연필.펜.갈대펜. 새 깃털로 된 펜등을 
이용하여 그렸다는 <밀밭>은 화가의 집중력의
완성도를 한눈으로 볼수 있었다.
고갱을 위해 새로 꾸며진 신혼부부 방같이 
깨끗하고 아늑하게 꾸며놓고 고갱을 기다리던 빈센트는 
자신의 가장 좋아하고 즐겨 그리는 해바라기꽃 그림을 
그의 침대 정면에 걸어 놓기도했다.
하지만 정작 빈세트자신에 방은 흰색을 칠한 
나무 침대 하나를 갖다 놓았을 뿐이다.
신인같이 지적이고 바다같이 낭만적이고 표범같이 야생적인 
희망을 창조하는 일의 동반자 고갱을
맞이는 빈센트는 뿌듯하고 행복감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우선 그들은 성격구조가 달랐다고 빈센트는 고백한다.
내성적익 사색적인 빈센트와 
매우 적극적이며 야수같은 정열의 소유자 고갱은 
속에 있는 것을 함부로 말하지않는 빈센트의 습관과, 
하고 싶은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급한 성격의 고갱과는 
전혀 어울리수가 없었다고한다.
12월23일 오래간만에 식사를 같이하며 화해를 
시도했지만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고갱은 
조용히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서로 속이고 괴롭히는 바보스러운 짓을 
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하며 
새해에는 더이상 싸우지 말고 
각자 갈 길을 찾아 가자고했다.
하지만 빈센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또 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한다.
단지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한 귀로 들어 와
가슴을 찢어놓고 또 한 귀로 나가곤 했으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 막으며 
나를 이렇게 버리고 가지 말고 같이 있어 
달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고갱은 빈센트의 절규에도 아랑곳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노란집으로 향하는 빈센트에게 차가운 겨울바람이
귓전을 때리며 속삭입니다.
"빈센트, 자네의 꿈은 현실에서 너무 먼 곳에 있네"
노란집에 화가들의 안식처를 만들고저 했던 꿈은
그렇게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그 냉혹한 소리를 귀담아 듣게 한 자신의 귀가
별안간 저주스러워 서랍속에 면도칼을 집어
오른쪽 귀를 베어내리며 중얼거립니다
"이 더러운 귀는 더 이상 필요 없어!" 
잘라낸 귀를 흰 종이에 곱게 싸서 
자신이 즐겨 찾던 라셀을 찾아 가
그녀의 손에 쥐어주고 밖으로 나옵니다.
2주간의 병원 생활을 끝내고 다시 노란집으로 
돌아 온 고흐는 자신의 가장 친한 우체부롤랭 처 오귀스틴의 초상화 
<요람을 흔들고 있는 어머니>를 그린다.
고흐에게 있어 해바라기꽃은 인생에
희망과 기쁨의상징이다.
그리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그를 도와준 <의사 레이의 초상화>도 그려준다.
하얀 붕대로 귀를 동여맨 얼굴 
그리고 입에 문 긴 파이프에서 피어 오르는 하얀 연기 
검은 털이 달린 모자
두툼한 겨울 외투 
빨알간 벽이 그나마 따뜻하게 느껴졌던 
<붕대를 감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자화상>은
왠지 철없는 아이같이 순수해 보이기만했다.
특히나.하얀붕대로 싸맨 귀언저리가.....
가장 절친했던 우체부친구 롤랭이 전근가자
그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 싶은 마음 뿐였다고한다.
"하나님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도 잔인 하십니까.
이 죽어가는 몸을 떠받쳐주던 그를 제 곁에서 떠나게 만드십니까. 
착하고 사랑스러운 그의 처 천사 마르셀 
그 모두가 저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 병든 저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갑니까."
날이 갈수록 슬픔은 더해갔고 드디어 정신착란
증세를 다시 일으키고 말았다.
병원에 입원했고 의사 레이의 정성어린 치료를 받게된다.
1년 반동안 아를시절에서 고흐 생애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며 다시 생레미 정신병자 수용로 가게된다.
미쳤다는 것에 대한 불만보다는 더 좋은
그림을 창조하기 위하여 미쳐 버리기로 했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그는 병원 정원에서
<아이리스>그림을 그린다.
생래미시절에는 그의 정신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올리브나무가 있었다.
하늘을 치솟는 웅장한 사이프러스나무엔 이집트의
한 왕자의 꿈을 간직한 영혼이고 올리브나무는
예수님의 고통의 상징으로 상상한다.
고갱,베르나르,피사로,로트레크,시나크등 화가들이
초청 되었던 제18회 레 맹전이 브뤼셀에서 열렸을때
고흐도 초청이 되어 6점의 그림을 동생 태오가 출품해준다.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알베르 오르에라 평론가는 
내노라는 화가들을 제치고 고흐에게 자연과 더불어 살며
팔레트에서 기쁨을 창조하는 위대한 예술가라고 서두를 달아주며.
표현 방법에서는 용광로에서 녹아내리는 현란한 보석들이 
용액을 화판에 부어내는 몽티셀리의 그것보다 더 
화려하고 완벽하다고 평해주었다.
그리고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렸다는 기쁜 소식도
테오는 고흐에게 전해준다.
생레미시절 제정신이 돌아올 때는 그림을 그렸다.
3월 초순에 있던 파리 살롱 앵데팡당은 고흐에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끈 전시였다.
고갱 조차 고흐에게 축하의 편지를 보내며
자기의 그림과 교환하자고 간청해왔다.
생레미 정신병원시절을 보내고 5월20일 오베르로 간다.
오랜된 친구같은 친밀감도 있고 큰형님같은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가셰주치의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건강진단을 받으며 <닥터 가세의 초상화>를 그리게된다.
직장을 옮긴다는 동생 테오의 편지를 
애타게 기다리다 지친 고흐는 
아무 생각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고 
본능에 따라 살 수 있다면 
틀림없이 자연의 숨결을 호흡 할 수
있을거라는 관조의 세계를 깨닫는다.
동생테오나 주치의가셰씨나 모두 자기 일이 바빠
다른 누구를 도와줄 처지가 아니기에 그것에 연연하며
속태울 필요가 없이 세상을 관조하며 앞으로 다가올
것을 아주 조용히 기다리면 마음속은 무겁지만 
조용한 평화가 찾아 온다는 것을 경험한다.
1890년 7월 27일 평상시와 같이 식사 후
그림도구를 싸들고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밀밭을
향하고 있을때 소나기를 만나게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는 동생 테오가 그리워
정신을 가다듬고 편지를 쓰기시작한다.
"나의 사랑하는 동생 테오야.
언제나 그렇게 항상 너에게 말해왔지만
너는 단순이 남의 그림만 파는 화상은 아니란다.
사실 너는 나와함게 그림을 그리는 영원한 동반자다.
내가 항상 너의 의견과 생각을 나의 그림에 반영
했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서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을 때는 더욱더
도와가며 인생을 헤쳐가야 되지 않겠니?
어쨋든 나는 그림에 내 운명을 걸었으며 이제
그 반은 성취한 느낌이다. 나머지 반은 어쩌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점심시간이라 다 끝내지 않은 편지는 윗도리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선다.
황금들판을 지나 옛 성으로 천천히 가고 있는데
검은옷을 입은 악마의 사신이 두손을 벌리며
고흐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착각에 빠진다.
죽을 힘을 다해 권총을 꺼내어 한방을 쏘게된다.
그리고 그는 땅바닥에 쓰러지게된다.
파리에서 온 동생 테오에게 그는 이야기한다.
"테오야....이제 이대로 내버려두려무나.
내 가슴의 고통을 들으며 그냥 가고 싶어"
1890년 7월 29일 고흐는 그렇게 저세상으로 가게된다.
동생 테오는 고흐의 유작전이 끝나기도 전에
형의 죽음의 충격으로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형이 죽은지 1년만에 그도 형을 따라 가게된다.
천만다행인것은 테오의 처 조가 
고흐의 작품들을 네델란드로 옮겨가 잘 간수하여
고흐 그림 전시회도 여러번 개최하고 
편지들을 모아 출간하며 형제의 뜨거운 우정을
세상에 알리는 참으로 지혜로운 여성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우리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볼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것 같다.
고흐는....
정이 무던히도 많았던 사나이였지만
또한 여자운도 어지간히 없었던것 같다.
단지 그가 쉬잔 발라둥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림은 개성적으로 잘 그렸는데 못 생겨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는지 그 진위야 알수 없지만
아무래도 팔자소관은 아니였나 싶기도하다^~
목사가 되기를 원했고
열정을 온통 그림에 쏟아 부었던 고흐.
노란색과 해바라기를 무던히도 좋아했던 그는
노란색을 희망과꿈을 담은 색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노란색은 개나리 병아리 그리고 은행잎을
연상하며 천진난만한 색같았는데 
고흐의 꿈의 안식처이고저 했던 <노란집>과
황금들녁였던<라 크로의 추수 광경>을 보면서
물질과 정신의 풍요를 두루 가져다 주는 색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에피소드:
매일 아침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스팸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 주시는 바보사부님이 계신다.
일년 365일 주말과 공휴일만 빼 놓고
매일 문자를 보낸다는게 말이나 글처럼
쉬운 일은 절대로 아니다.
습관처럼 늘 받기만 하는데 익숙해지다보니
당연한 걸로 생각될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던것 같다.
지친 일상으로 힘에 겨울때 사부님의
문자 메시지를 보면 괜시리...가슴이 메이고
눈물이 글썽해지곤했다.
매일 오던 문자 메시지가 저번주부터 
오질 않는다.
어디 외국 출장이라도 가셨는지 아님 많이 아프신지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하여
문자 한번 보내봐야지 하면서도 
지금은 바쁘니까 조금 있다...차일 피일 미루다
며칠째 그냥 지나갔다.
문득 ....생각한다....
사부님의 문자 메시지 인연이
이것이 마지막이라 하더라도 ....
그동안 충분히 행복했다는 것으로 
무한히 감사를 드린다.
그렇지만...괜시리 슬퍼질려고 하는 것도 
부인 할수 없는 사실이다.
사부님께서 쓰시는 컬러링은 돈 맥린 (Don McLean)이 부른 빈센트다.
37살짜리 노총각사장님과 같이 근무한다.
하지만 얼굴 맞대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지않다.
초겨울이 시작되는 작년 어느날 빈센트 반 고흐전
다녀왔는지 팜플렛을 책상위에다 놓는다.
염장 질러도 유분수지 미움과 부러움이 동시에 일었다.
물론 나도 시간을 내서 고흐전 갔다 오면
그만이지만 마음 뿐였다.
며칠전 민길호님께서 쓰신 빈센트 반 고흐 자서전을
가져오셨다.
사장님 보기도 전에 미리 보는 실례를 저지르고 말었다.
고흐만큼은 못생기지 않았지만 
성격은 다분히 고흐와 흡사한 37살짜리 머스마사장님.
동생도 한참 막내동생 정도되는 나이이기에 동생처럼 잘해 주고 싶지만 
천성은 어쩌지 못하는지 새침떼기에 낯가림쟁이인 나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가 겉돈다.
수더분한 아낙네는 될수 없는 것인지.....원^~
나라안에서 환쟁이들만 모인다는 H대학 서양학과를 동생은 다녔다.
고흐와 흡사한 동생을 아버지가 웬수같이 생각하지만
평생 뒷바라지 하신다. 
하지만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내가 동생에게 해 줄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한가지다.
그의 재능이 하나님을 위해 꼭 쓰임 받도록 
간절히 소망하는 나의 기도가 있다.
주님께 상달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08.3.23
NaMu

생레미 정신병자 수용소에 있던 시절 그린 그림이래요.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캔버스 위의 유채, 소장: 뉴욕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