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와 장마
우람한 나무들이 즐비한 화단가에 살구가 부상당한 병사처럼 상처를 입고 떨어져 나뒹굴어 순간 발길이 멈칫했다.
'살구다' 마치 옛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 그들과 쌓았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넓은 아파트 뜰안에는 유실수 살구나무가 많았다.
봄이 무르익어가면 향기가 유난히 달콤했던 살구꽃 향기가 아파트 뜰안을 가득채우고 특히나 쓰레기통 옅 화단가에 있던 살구나무에 살구꽃은 음식물쓰레기에서 나는 악취를 희석시키는데 일조를 단단히 하였으니 그들의 옛쁜짓이야 말로.
비록 '화무십일홍'이라 늘 안타깝게했지만, 어느 순간 그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리고, 장마가 시작되는 어느 날 '짠'하고 나타나는 주홍빛이 도는 노오란 살구.
먼저 따는 사람이 임자인 아파트 뜰안의 먹음직스런 살구는 이미 누군가의 손에 없어진지 오래고 화단가에는 빛좋은 개살구만이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는 꼭 따고 말리라고 벼르던 비 개인 오후, '살구서리' 할 만한 도구를 아무리 찾아도 없어아쉬운대로 우산을 들고 나섰다 살구나무에 보란듯이 예쁘게 매달려 있는 살구들을 향해 우산을 있는 힘껏 던졌다.
우수수 떨어지는 주홍빛 도는 노오란 살수를 앞자락에 주어 담으며
횡재라도 한듯 가슴이 울령울렁거렷다.
시고 떪어서 아무도 따지 않는 개살구와 살구를 따면서 부서진 우산을 주워들고도
나는 왜 부자가 된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을까?
딸아이가 6학년 때니까 지금으로 부터 십팔 년 전 일이다.
어느 날 오후 학원에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오니 문 앞에는 검은 비닐봉지에
살구들이 얼굴을 삐죽이 내밀고있다.
'슬기엄마가 그새를 못참고 드디어 낭구잡이를 했구나''
비닐봉지를 집어 드는 순간 되지도 않는 영어회화를 배운다고 돌덩어리를 얹어 놓은 것처럼 답답하고 심난하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낭구잡이 잘하는 앞집 슬기엄마가 동네 엄마들과 살구를 땃다고 놓고 간 것이다.
애궁 그렇게 잼난 일에 빠지다니 키가크고 한덩치하는 슬기엄마가 살구나무에 올라가
살구따는 모습을 상상하니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살구나무 가득하던 아파트의 넓은 뜰안은 팔 년 전 쯤에 25층 아파트숲으로 변하여 자취조차 없어졌다.
재건축이란 대세에 밀려 아파트 안에 넓은 뜰안은 잃어버렸고,
맘씨 착한 슬기엄마도 어디로 갔는지 감감 무소식이다.
마음을 의지하던 친구들도 상황에 따라 멀어지는 우리네 생활이다 보니,
때론 있는 그 자리에서 무던히도 기다리며 평안을 주는 대자연이 마냥 그리워진다.
숲속에는 어떤 일들이 있을까? 장마가 왔다 갔다 하는 요즈음.
2019.7.5
Na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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