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설마 그래도 그렇지만 희망과 포기로 롤러코스터를 타며
한 달 가까이 버려두었던 배낭을 열었더니 배낭 깊숙이 아이젠이 잠을 자고 있었다.
"아! 있었구나"
아직도 바람은 매몰차게 봄을 거부한다 하여도 입춘이 벌써 지나고 나자
날씨는 꾸준히 영상으로 끌어올리며 봄인 척하고 있어 과연 눈산행을 할 수 있을지
심히 의심하면서도 아이젠이 손에 잡히는 순간 반가웠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유난히 눈이 많이 왔던 지난겨울 마음이 먼저 아이젠을 차고
눈이 수북수북 쌓인 산길을 헤매고 있지만,
마음뿐 갈 기회가 없어 애를 태웠는데 봄이 저만치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겨울의 끝자락에 드디어 눈산행을 하게 되었다.
태기산행
겨울산행의 백미 눈꽃산행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태기산으로 산행이 있는 날입니다
끊임없이 기다렸던 눈산행이기에 괜스레 설렘으로 서성이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가시지 않은 첫새벽 겨울밤의 파수꾼 가로등 불빛이
도로를 환하게 비추며 오랜만에 산행을 응원합니다.
그들의 응원에 나도 모르게 활짝 웃음꽃을 피우며
태기산행 버스가 있는 사당동으로 갔답니다.
두 어달만에 혹은 코로나19가 터지고 몇 년 만에 뵙는 산우님들도 계셨지만
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가움에 안부인사가 정겹습니다.
차창너머로 새하얀 무서리가 뼈만 남은 앙상한 가지마다 두툼하게 내려앉아
살벌하게 추운 아침 겨울풍경이 가까이 다가왔다 멀어집니다.
미세먼지 주의보까지 있어 8시가 넘어도 아침 햇살은 간 곳이 없고
진퇴양난의 추위로 고문을 당하는
그들의 모습이 애처로워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무심한 듯 그렇지만 제 할 일을 다하는 태기산행 버스가
산부자 동네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삽교리 양구두미재 주차장에 도착하자
전국에서 달려온 산행버스들로 주차장은 벌써 만차라고 하여
겨울산행 태기산의 인기를 실감했습니다.
회색 시멘트로 쫘악 펼쳐진 태기산 들머리 양구두미재 임도길 양옆에는
잔설이 6~7cm 정도 쌓여 여기가 눈부자 동네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살아있는 새하얀 눈이 기특하여 마음은 점점 더 그들 곁으로 다가갑니다.
하얀 풍차가 있던 바람의 언덕
분명히 그것은 풍차였습니다. 하얀 풍차.
돈키호테는 풍차가 거인이라고 자신의 비서였던 산초판사에게 우기며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정의의 용사가 되어 창을 들고 무섭게 돌아가는
풍차를 찌르는 순간 돈키호테와 로시난테는 하늘로 번쩍 올려졌다가 들판에 대굴대굴
구르는 수모를 당했다고 세르반테스가 우리에게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했던
그 풍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습니다.
들머리 양구두미재에서 풍차들이 있는 바람의 언덕 풍력발전 단지까지는
산철쭉길이란 근사한 이름까지 있으나 지금은 겨울철 산철쭉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군용 도로라서 회색빛 시멘트길에 얼핏 끼어 있는 잔설들이 눈꽃인양 맵시를 선보지만
위험천만 그들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뒤에 오시던 사려 깊은 산우님께서 한 마디 하십니다.
"조심하세요 이제 다치면 못 고쳐요"
아.... 얼마나 가슴에 와닿던지 이제는 뼈를 다치면 완치가
불가능한 나이가 되었구나....
때론 살얼음이 끼어있어 임도는 반들반들했지만 스틱을 주 무기로
가볍게 풍차가 있는 풍차발전 단지에 올라왔습니다.
풍차발전 단지 옆에는 형형색색 바람개비들이 일렬종대로 서서
우리들을 반겨주며 바람의 언덕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어린 시절 수수깡으로 바람개비를 만들었던 바람개비와 흡사하여
너무나 아득한 어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나 살짝 의심까지 해보며
황금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게 하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하얀 눈 위에 쓴 편지
내리막 임도길에서 철조망이 쳐진 울타리옆에 철조망 문이 살짝 열려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물론 아프리카 돼지방역으로 출입금지였지만 살짝 열린 문은
태기산 정상으로 가는 지름 길였기에 드디어 아이젠을 재빠르게 차고
살며시 열린 철조망 문안으로 들어갔답니다.
90°에 가까운 언덕길에는 눈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눈산행을 온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심하게.
깔딱 고개라는 것을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무한정 쏟아부은 것은 순전히 새하얀 눈때문였습니다.
아이젠이 눈을 밟을 때마다 저벅저벅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따라옵니다.
가파른 언덕길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헐 떡 헐 떡 거렸지만
하늘이 훤히 보이는 산길이고 정상이 저만치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어
마지막 남은 힘까지 남김없이 쓰고 말았답니다.
새하얀 눈이 새하얀 편지지가 되어 정상을 향한 산길에 펼쳐 놓았습니다.
편지를 쓰세요 손 편지를 아니 스틱으로 편지를 쓰세요.
그렇게 그들은 나를 유혹합니다.
갑자기?
누구에게?
"너를 위해" 그렇게 섰습니다.
난 너를 위해 지난겨울을 보내면서 그토록 기다렸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왜 울컥했는지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태기산 (해발 1,261m) 정상입니다.
해발 1,000m 고지지만 들머리 양구 두미재가 해발 980m이기 때문에
깔딱 고개 하나만 숨이 차게 올라오면 됩니다.
태기산 정상은 한국방송공사 송신소와 군부대가 독차지하고 주위에는 철조망 울타리까지 쳐져있어 사진
촬영조차 금지이지만 해발 1,261m 고지이기에 굽이굽이 이어진 산들 너머로
계방산도 아슴푸레하게 보이고 치악산도 한눈에 들어옵니다.
태기산은 고대부터 존재감이 뚜렷하여 삼한시대 진한의 마지막 왕 태기왕이
산성을 쌓고 신라와 전의를 불태웠던 산이라고도 합니다.
태기왕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산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태기산에는
횡성과 평창 주민 25,000 가구가 사용하는 하얀 풍차 풍력발전기 20기가
그림을 그려놓은 듯 펼쳐져 있습니다.
하산길 철조망 울타리 옆 손바닥만 한 샛길 바로 옆에는
천길 낭떠러지라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나가 인식했는지
조심조심 때론 울타리 철조망을 잡으면서 내려갔습니다.
종아리를 덮는 눈이 스패츠를 차지 않아 등산화 속으로 들어옵니다.
양말이 젖을까 봐 중간중간 신발을 벗으며 눈을 털어냈습니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나는 아니 우리는 왜 이토록 험한 길을 걸어가면서
재미있게 웃음꽃을 피우는 것일까?
2023년 2월 12일
NaMu
에필로그:
태기산 정상석은 정상에서 200m 내려온 지점에 있습니다.
태기산 정상에는 방송국 송신소도 있고 군부대도 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놓듯 하지만 양구두미재 임도를 따라 걷다 보면
하얀 풍차를 연상하는 풍력발전기도 만날 수 있어 엄동설한 한겨울 상고대를 보고 싶다면
이보다 편하고 근사한 상고대와 눈꽃은 보기 드물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운이 좋아 출입금지 정상까지 위험하게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