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
일 년 중 가장 춥다고 하는 소한과 대한사이 추운 건 당연지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기회를 엿보던 동장군이 칼바람을
앞세워 수은주를 영하 10°이하로 떨어뜨리며 달려들 때는 겁도 나고 슬며시 짜증도 났다.
올 겨울 처음 산행이 코앞인데 한파라니
어쩌자는 건지.
천만다행 한이틀 동장군의 심통을 견뎌내면 그나마 영하 10°도는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며 무던히도 기다렸다.
마치 숨겨놓은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새해 을사년이 시작된 지도 열흘이 넘어가는
1월 둘째 주 일요일은 선자령으로 산행이 있은 날이다.
일 년 만에 아이젠을 배낭 속에 챙겨 넣으며 스패치를 넣을까 말까 순간 망설였다.
무거운 배낭이 끔찍이도 싫어 과감하게 빼고 대신 중등산화를 신기로 했다.
1kg이 채 안 되는 스패치를 넣지 않아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현관문을 나서자
간밤을 지키던 도심에 파수꾼 가로등 등불이 환하게 문안인사를 한다.
오랜만에 산행 자랑질도 하고 싶었지만
한파도 거뜬히 견뎌내며 여전히 환하게
거리를 비추는 그들이 대견하여 많은 것을 보고 이야기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선자령 산행버스가 기다리는 군자역으로 갔다.
선자령 산행
몇 달 만에 군자역에서 산우님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선자령 산행 버스에 올라갔다.
서리가 내려앉은 차창문을 휴지로 닦아내자 묶은 때처럼 하얀 서리가 밀려 나온다.
얼마나 추운지가 새삼스러워 소름이 돋았다.
이른 아침 눈 속에 파묻힌 것 같은 농가의
풍경이 차창문 너머로 가까이 다가왔다 사라졌다.
아침 짓는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하던 농가의 풍경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지만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는 들녘은
아득히 먼 어린 시절이 떠 올라 서리가 서려 보이지도 않는
차창문을 휴지로 닦고 또 닦았다.
선자령 산행버스가 무심히 달려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마을 휴게소 주차장에
도착하자 전국 각지에서 온 산행버스들로 인산인해였다.
아침햇살이 가득한 주차장에는 하얀 풍차도 있어
풍차마을에 온 것을 피부로 실감하는 순간이다.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 아스팔트길을 스틱으로 꼭꼭 찍으며 올라가자
'대관령국사성황당' 입구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 넣은 커다란 비석을 만날 수가 있었다.
"대관령에는 대관령 산신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산신각과
강릉출신 범일국사를 모신 성황사가 있으며
산신각에서는 산신제를 성황사에서는 성황제를 치르고 나면
강릉단오제를 시작하는데 강릉단오제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문화유산" 이란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왜 어깨가 으쓱했을까?
세찬 바람과 능선길의 합작품 풍차 동산.
아이젠을 차고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선자령 들머리 등산로 입구로 들어서자
선자령 5.0km라고 표시한 친절한 나무 이정표도 만났다.
5.0km 십리 조금 넘는 수준이라 왠지 가볍게 산행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눈이 덮여있는 아스팔트 임도 길을 올라가다가 KT 송신소 옆길로 들어섰다.
여전히 눈 덮인 산길을 가다 보니 선자령 3.2km라는 나무 이정표가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덤으로 목장코스라고도 하지만 목장은 아무리 봐도 없는데
왜 목장코스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람들이 나무들이 눈 속에 파묻혀 있는 숲 속 길은 새찬 바람이
인정사정없이 불어 얼굴까지 얼얼했다.
쌀가루처럼 휘날리는 새하얀 눈을 조심조심 밟으며 가파른 숲 속 길을 지나
또다시 완만한 산길에 올라가자 선자령 2.5km 목장코스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선자령 2.5km 아.... 오리 남었군요"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며 쉼 없이 올라갔다.
수시로 불어대는 칼바람 때문에 쉰다는
것은 엄두조차 할 수없었다. 솔직히
이제는 파트너가 바뀌었다.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우람한 나무들은 간 곳이 없고
눈 속에 파묻힌 자그마한 나무들의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풍차가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하자
동해바다를 볼 수 있는 전망대도 나왔다.
저 멀리 푸른 물 넘실 거리는 동해바다가
그림을 그린 듯 펼쳐놓아 제아무리 칼바람이 아우성을 치며
우리들을 괴롭힌다 할지라고 잠시 잊고
그들의 매력에 흠뻑 빠져 한동안 발걸음도 멈추었다.
선자령 0.8km 선자령이 코앞에 있는
능선에는 새하얀 풍차들이 너도나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바람 잘 날 없는 동네답게 풍력발전단지가 2004년
조성되어 53개의 풍차가 있다고 한다.
눈이 하얀 게 덥힌 언덕길을 세찬 바람에 등 떠밀려 '백두대간선자령'이란
비석이 있는 정상에 올라왔다.
언제 들어도 이름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선자령은
'선녀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계곡에서 목욕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높이는 해발 1158m 천 미터 고지지만 대관령 마을 휴게소 주차장까지 830m를
버스로 올라오기 때문에 328m만 올라오면 되는
마치 동네 뒷산 가듯이 가볍게 할 수 있는 산행이다.
선자령 정상에 서면 남쪽으로는 용평스키장으로 유명한 발왕산,
서쪽으로는 눈꽃과 상고대가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계방산,
서북쪽으로는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국립공원 오대산,
그리고 북쪽으로는 황병산을 훤히 볼 수 있어
과연 '백두대간 길'이구나 하고 새삼 상기했다.
하산길에 앞서 가시던 낯선 산우님께서 감동하시며 동화마을 같다고 하신다.
"갑자기 동화마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할 말을 잊었다.
그것은 바람개비 마을였다.
이따금씩 잔설이 있는 능선에는 하얀 바람개비들이
서로 어우러져 형용할 수 없는 비경을 선사하고 있었다.
선자령 바람개비 마을
강릉시민을 위해 에너지만 생산하는 줄 알었는데
할 말을 잊게 하는 비경도 빚어내는구려.
서로 어우러져 깊이를 알 수 없는
평안을 선사하는 바람개비들이여
어이 잊으리 오늘 그대 모습을!
눈 속에 파묻혀 있는 소나무 숲 속을
가볍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시소게임을
하기도 했고.
드 넓은 양 떼 목장에는 양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텅 빈 목장에 두툼하게 덮여있는 새하얀 눈은 차마 고즈넉하기까지 했다.
들머리 등산로 입구부터 날머리 재궁삼거리를 지나 대관령 마을 휴게소까지
12km를 시종일관 하얀 눈이 쌓인 눈밭길을 걸으며
비록 눈꽃이나 상고대는 없었다 하더라도 칼바람과 사투를 하면서
올 겨울 눈산행을 기어이 해냈다.
2025.1.12
Na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