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행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 마자 재빠르게 창문부터 열었다.
옅은 구름 사이로 햇님이 수줍은 듯 불그스르한 모습을 분명 보았다.
며 칠동안 가슴 조이며 했던 걱정이 일 순간 사라졌다.
'비는 오지 않을 거야 저렇게 하늘이 멀쩡 하기만 한 걸'
혹시나 싶어 우산을 챙겨 배낭 속에 넣긴 했지만,
하늘을 지키고 있던 햇님을 굳게 믿으며 낙성대 역으로 갔다.
두어 달만에 만나는 산우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관악산행을 하기 위해 마을 버스를 탔다.
서울대 연구공원앞 거리에 은행나무들이 온통 노오랗게 물들어 내 마음을
사로 잡고 있어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다.
"너무 너무 예쁘져!"
혼자 보기에 그들은 너무도 곱다.
'깊어가는 가을'은 환상였다 하더라도 키 작은 떡갈나무가 전혀 주던 이야기.
서울대 연구공원 사이길 따라 한적한 숲 길을 올라가면 소나무 숲이 나온다.
사시사철 푸르름을 자랑하는 소나무도 잔솔 털어내듯 누우렇게 변해버린 솔 잎 털어내어
산길을 소복히 덮고 있지만 솔 향기만은 변함없이 숲 속을 진동한다.
가슴 깊이 솔 향기를 들여 마시며 삶에 찌들어 버린 내 영혼을 희석시킨다.
언제나 그렇지만 솔 향은 영혼을 맑게 해 주는 신비의 묘약 임에는 틀림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산길을 올라갔다.
떡갈나무가 유난히 많은 숲 속에는 메마른 낙엽만이 수북수북 산길에 쌓여있다.
나무들이 저 마다의 모습으로 형형색색 가을 옷 갈아입고 '깊어가는 가을'이벤트가
한창 일거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 했다는 것을 알았다하더라도
바위틈 사이에 키 작은 떡갈나무에 매달린 메마른 나뭇잎들이 뒤늦게 가을산행하는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들의 예쁜 짓에 순간 길이 멈춰지며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카메라 앵글속에는 바스라질듯 메마른 나뭇잎조차 고은빛으로 살아난다.
지난 가을 화려했던 시절을 살며시 펼쳐보이며....
때 아닌 태풍을 만난 것처럼
찬바람이 제 세상을 만나듯 신나게 불어대지만 등허리에 차 오른 땀을 식혀주고 있어
"바람 줄어 좋은 날'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이야기하면서 찬바람을 맞으며 거침없이 산행을 하자,
심술쟁이 찬바람은 절대로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아니라는 걸 비구름 몰고오면서 보기좋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비구름 가득한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위태롭다.
아침나절 해 맑은 하늘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우중산행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고 찬바람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
하지만 심술첨지답게 바람은 시간이 갈 수록 더욱더 거세지고 있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는 마치 풍랑을 일으키는 거센 파도소리와 흡사하여
마음은 이미 좌불안석이다.
바람을 피해 하마바위 아래 서 있으니 한강 너머로 남산 타워와 북한산 그리고 오봉이 보인다.
오랫만에 친구를 만난 듯 그들에게 반가운 마음을 전해 보며 날아갈듯 거센 바람을 뚫고 산행은 계속 되었다.
이따금씩 빗방울도 맞으면서
커다란 마당을 산 위에 턱 올려 놓은 것처럼 넓직한 마당바위 아래
바람이 들지 않는 곳을 겨우 찾아내어 점심 식사를 하면서 비바람을 맞으면서
산행을 계속 할 것인지 하산을 할 것인지 의논을 했다.
산우님들 모두가 하산하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던 것은
첫 번째 특급 태풍에 준하는 찬바람과 비를 맞으면서 산행을 계속한다는 것은 최악의 유격훈련이라는 것.
두 번째 크고 작은 바위들이 곳곳에 암초처럼 도사리고 있는 관악산이고 보면
비에 젖은 바위를 밟고 산행을 한다는 것은 자칫 사고를 불러오기 쉽상이라는 것.
세 번째 집 가까이 있는 산이니까 마음 만 먹으면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 것
이 세 가지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하산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
거센 바람에 등 떠밀려 하산 하면서
산 중턱에 뽀쪽이 나와 있던 국기봉위에 산행꾼들을 보았다.
등산복이 알록달록 바위에 피어난 꽃처럼 보여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 정겹기만하다.
개인적으로 관악산이 정이 들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쉽게 산행을 할 수 없는 산이라는 인식때문였다.
하지만 자꾸 보면 정 들듯 산행도 하다보니 정이 드는건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싱긋 미소가 머금어진다.
나무들이 무성하게 있는 계곡 입구 약수터에서 노오란 단풍나무를 만났다.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던 노오란 단풍나뭇잎이 너무도 아름다워 눈요기를 실껏하면서 기어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기다려 주어 고맙다.
가을 산행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가슴조이며 기다렸다.
낙엽이 두툼하게 산 언덕을 덮고 있던 관악산.
계곡 입구 약수터를 지키던 단풍나무.
노오란 단풍나뭇잎 가지런히 펼치고 부채춤을 추며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몸짓에 가을 향기 담뿍 묻어 있다.
참고 기다려 주어서 고맙다.
노오란 단풍잎아.
바람이 잠잠하던 계곡길에는 낙엽이 소복히 쌓인 낙엽정원이 기다리고 있다.
아...이제는 저물어가는 가을이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였다.
여전히 햇살은 화사하고 출퇴근길 거리의 가로수들은 고운빛의 가을옷 입고 있는 걸 보았다 하더라도.
"여자의 마음과 눈 속의 낙엽은 알 수가 없으니 조심하라"고 어느 해 가을
단풍으로 서울 근교 산에서는 가장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한 도봉산행에서 했던 산우님 이야기다.
낙엽 쌓여 있는 길은 넘어지면 다치니까 조심하란 이야기였는데 거기에 왜 여자의 마음과 비교를 했을까?
순박한 남자의 마음에 표현이 아닐까 싶어
낙엽이 쌓여가는 가을이 오면 잊혀지지 않고 떠 오른다.
나뭇잎 배
시냇물처럼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에도 낙엽은 떨어져있다.
메마른 나뭇잎 배에 그리움 가득 실어 띄웠다.
혹시라도...
나뭇잎 배가 보인다면 내 마음인 줄 아옵소서
2012.11.4
Na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