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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NaMuRang
2009. 9. 28. 10:58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밤비가 흘러내리듯 임자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 얼굴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날 루~루루루루루루루~루루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그가 동숭동 서울문리대 다니던 시절 술 한잔 거나하게 취하면 부르던 노래라고한다. 그리고 그는 꼬레(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 갈 수 있는 외로운 망명자가 되어 자신을 향해 절망스럽게 절규한다. 빠리에 오세요 아! 꿈과 낭만의 도시 빠리에 오세요. 내가 갈 수없으니 당신이 오세요. 나를 찾지 않아도 돼요.아니 찾지마세요. 그러니까 당신이 빠리에 오세요. 왔다가 그냥 가시더라도 빠리에 오세요' 중고등학교를 시험봐서 입학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려깊고 똘똘했던 그는 최고의 실력이라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KS(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마크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서울공대 뺏지를 달은 교복을 입고 아버지와 함께 자랑스럽게 그의 고향을 가게된다. 적어도 갈때까지는 그랬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하지만,그는 6.25 민족동란때 부역자 집안였다는 이유로 집안은 풍지박산이 났으며 아나키스트였던 아버지는 이쪽저쪽으로 피해다니느라 집안을 보살피지 않아 돌도 채 되지 않았던 그의 동생 민화는 병으로 죽고 동생을 잃은 어머니는 혼을 놓아버려 결국 자신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손에 키워진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는 증오의 대상으로만 배워왔던 강 건너편 세계를 인정하면서 방황은 시작되었다고한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서울공대였지만 공부에 흥미를 잃어버린 그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된다. 방황에 끝이 보이지 않던 그였지만 머리 좋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공부 밖에 없으니 서울대 외교학과에 다시 입학하게된다. 물론 외교관이 꿈이였지만, 장래 희망란에 '정치학사'라고 쓸 때부터 그의 대학생활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건 이미 예견한 일이다. 대학교 3학년 1971년 봄 말수적고 숫기없고 내성적인 그를 소리꾼임진택은 문리대 연극회원으로 끌어들인다. '별난 사람들'이나 연극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그도 문리대 연극회원이 되어 김지하선배를 만난다. 김지하 시인의 요청으로 그는 김지하시인 작품 '구리 이순신'과'나뽈레옹 꼬냑'등의 조연출을 맡아 동분서주하며 연극 연습에 온 힘을 기울인다. 하지만,서슬이 퍼런 정권은 자신들을 정면으로 풍자하고 비판한 그들의 연극을 허가 해 줄리가 없어 연극은 끝내 무대에 올리지도 못하고 사산되고만다. 그리고 그들은 그 당시 각 대학내에 있던 군사파쇼독재 반대데모에 한 몫을 더하기위해 그의 외할머니가 운영하던 여관에 모인다. 끝내 그는 선언문을 작성하여 천문기상학과 선배와 교내에 뿌리다가 '반공법'으로 걸려 중앙정보부 대공분실을 순회하며 고문을 당한다. 군 입대 일주일 전에 결혼식을 치른 그가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지례짐작으로 서빙고동 보안대에 끌려가 인격을 말살하는 잔인한 고문은 아무런 죄도 없는 또 다른 누군가를 지목해야만 하는 처절한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처음 그가 원한대로 천만다행 '정치학사' 졸업장은 받게된다. 그리고 그는 생활인으로 돌아 가 무역회사 빠리지사에 근무를 하게된다. 빠리에 온지 4개월만에 아내와 다섯살짜리 수현이와 두살 반짜리 용빈이가 그의 곁으로 온다. 그로부터 2개월 뒤 그들은 낯 선 이국땅에서 갈 곳이 없는 그들을 받아 줄 나라를 찾아야만했다. 한국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나라중에서... 그가 한국에 있을 때 활동하던 조직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 와해 되었기때문이다. 물론 남한을 전복시킨다는 불온단체는 절대로 아닌 통일을 위한 자생조직에 불과했겠지만 1979년 9월경에는 당연히 국사범으로 언론에서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을지는 그 시절 신문을 펼쳐보면 알 수 있으리라. 가고 싶어도 이제는 갈 수 없는 나라 조국으로 부터 버림 받은 그는 그렇게 빠리의 에뜨랑제(이방인)가 되어 생존을 위해 택시운전대를 잡아야했다. 서울대 다닐 때 고단하게 택시운전을 하는 종만이친구를 보면서 자신도 택시운전을 하면서 택시운전사들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해 보겠다는 야무진 꿈은 있었지만 그게 정작 빠리에 와서 생존을 위한 직업이 될 줄이야 어떻게 알었겠냐고 그는 고백한다. 머리 좋고 공부 잘하여 집안에 자랑거리던 청년였지만, 시대적 상황이 그를 청년 운동가로 만들어 암울한 우리네 현대사를 몸으로 부딪치며 저항했던 '홍세화'씨의 자전적 고백서를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낸다. 실제로 빠리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었던 홍세화씨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보았다. 빠리에서 택시운전사 시험을 보는 방법과 임차 택시운전을 하면서 겪는 갖가지 에피소드 그리고 빠리 택시운전사들의 생활과 한국에 택시운전사들의 생활을 비교하여 르뽀형식으로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삶이 아무리 고단해도 인텔리 타성을 버릴수가 없어 처음 그가 빠리에 오면서 배우고자하였던 '한 사회와 다른 사회와의 만남'에 공부는 생활고로 중도에 포기하고 말지만 확실하게 하나는 배운다. '똘레랑스' '똘레랑스'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고 프랑스 사전에 나와있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회의에서 시작되는 프랑스의 전통 철학은 나의 사상과 행동만이 옳다는 아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게 똘레랑스의 개념이고 타인을 존중하여 타인으로 하여금 존중을 받는 작업이 톨레랑스라고한다. 2002년 망명지 빠리에서 귀국해 한겨레 기획위원(지금도 하고 계신지 잘모르지만)으로 계셨던 '홍세화'씨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1995년 3월 '창비'에서 펴냈으니 14년전 이야기다. 이미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풀어가는 이데올로기이기에 작가의 18번 유행가처럼 흘러가버린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다시금 그의 이야기를 새겨 듣게 되는 이유는 평화와 자유를 위해 자신을 내 놓는다는 것이 생각만큼 흔한 일이 아니기때문이다. 어쩌면 과거를 되 돌아 보는 것은 보다 나은 내일로 가고져하는 희망 때문은 아닐까 싶다. 비록 그것이 개인의 역사나 할지라도. 09.9.27 NaMu